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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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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13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19.03.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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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사태와 국가지도자

최근 외신보도에 의하면 석유 매장량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중남미의 베네수엘라가 정치-경제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3월 7일 오후부터 수도 카라카스를 비롯해 총 25개주 중 24개 주에서 정전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3월 12일 기준으로 정전이 발생했던 24개 주 가운데 16개 주에는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나머지 8개 주에서도 부분 정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풍부한 수자원과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에서 이같은 정전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외신들은 베네수엘라의 정전 사태를 “정부와 공기업이 전력 시스템을 제대로 유지·관리하지 못한 탓”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이번 정전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베네수엘라 전체 전력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엘 구리’ 수력발전소의 고장 때문이라고 한다. 이 발전소에 대한 관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던 문제가 누적되어 오다가 한꺼번에 고장이 나면서 엄청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미 2014년 유가 폭락과 시추기술의 한계로 인한 석유 생산량의 감소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곤두박질쳤고, 2016년 5월부터 베네수엘라 시장이 마비되어 약탈과 강도 등이 일상화되면서 참다 못한 국민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찾아 주변국으로 탈출하고 있다. 특히 강폭이 100m도 안되는 ‘타치라’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콜롬비아로 가장 많은 베네수엘라 주민들이 발길을 옮기고 있다.

10여년 전만 하여도 콜롬비아가 베네수엘라에 손을 벌리던 처지였는데, 이제는 베네수엘라가 콜롬비아에 도움의 손길을 벌리고 있다. 콜롬비아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반세기나 이어진 내전으로 26만명이 사망하고 690만명이 국외로 떠나는 비극을 겪었을 때 가장 많은 콜롬비아 사람들이 찾은 나라가 당시 남미 최대의 부국인 베네수엘라였다.

콜롬비아는 좌파 정권이 득세한 다른 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우파 정권이 계속 집권하면서 복지 포퓰리즘을 거부하고 친시장 개방정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대부분의 남니 국가들이 경제난을 겪을 때 콜롬비아는 2.8% 성장을 이룩했고, 남미에서는 칠레에 이어 두 번째로 OECD에 가입했다.

이런 콜롬비아와는 달리 베네수엘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시작은 1998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차베스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차베스는 1999년 12월 ‘볼리바리안 신헌법’을 제정하였고, 2002년 4월 쿠데타도 있었지만, 2006년 3선에 성공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식 사회주의를 선포했다. 그는 집권시절 국부의 원천인 석유와 천연가스 등 자원 기업을 대거 국유화하였다. 그리고 국제유가 상승에 힘입어 획득한 오일 머니를 빈곤층에 대한 무상 의료·교육과 저가 주택 제공 등에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게다가 강력한 생필품 가격 통제정책을 시행하여 민간분야의 투자 의욕을 떨어뜨려 내수 산업기반이 부실하게 만들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베네수엘라가 1960년대부터 ‘엘 구리’ 수력발전소를 짓고 화력 발전을 줄이는 정책을 폈는데, 이는 석유를 최대한 수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좌파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남아도는 석유를 국민들에게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하는 포퓰리즘 정책을 펼쳤으며, 남미의 다른 좌파 정권에도 석유를 무상으로 원조하며 반미 전선을 구축하는데 활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차베스 대통령 시절인 2009년 수력발전에 의존하던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가뭄이 장기화하면서 저수 용량이 급격히 떨어져 전력 생산량도 급감했다. 정전이 잦아지고 곳곳에서 전력난이 발생하자 에너지 전문가들은 “전력생산 방식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차베스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하루 2시간 단전’과 같은 미봉책으로 사태를 무마했고, 차베스에 이어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2016년 가뭄으로 똑같은 문제가 일어났지만, 역시 ‘하루 4시간 단전’ 조치를 40여일간 지속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외면했다.

베네수엘라는 계속된 경제 파탄으로 작년에 2년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라는 오명을 안았고, 작년 8월 14일 UN은 베네수엘라 인구의 7%가 해외로 떠났다고 발표했는데,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베네수엘라 국민 10명중 1명꼴인 약 300만명 이상이 해외로 나갔다고 한다. 이는 현대사에 있어 최악의 엑소더스일 뿐만 아니라 금년들어 베네수엘라 물가가 1,000만%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웃 나라인 콜롬비아를 도와주던 베네수엘라가 2019년 들어 100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콜롬비아에 구걸하다시피 도움을 청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은 왜일까?

2019년 3월에 발생한 베네수엘라 사태는 국가지도자의 리더쉽에 따라 한 국가의 운명이 천당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틈새로 우리의 지난 시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

필리핀은 189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가 1942년 1월 일본군이 마닐라를 점령한 후 1945년까지 일본의 통치를 받았고, 이듬해인 1946년 7월 4일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였다. 독립 후 필리핀은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과 함께 전쟁 특수를 누렸는데, 1955년 아시아극동위원회가 발간한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1946~1954년간 필리핀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4.5%로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1위였다. 때문에 필리핀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보다 꽤나 잘사는 나라였다. 이는 당시 1960년대 기간 1인당 국민소득이 필리핀의 경우 158~270달러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91~239달러였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이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1972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였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는데, 당선된 후 경제발전과 정부개혁, 그리고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그리고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 동시에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문제들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그리고 1966년에는 베트남 지원법을 통과시키면서 연인원 1만명이 넘는 필리핀군이 베트남전장에 참전하게 되었다. 문제는 마르코스가 전임 대통령시절에는 베트남 파병법을 엄정하게 반대하였는데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입장을 바꾼 것이 미국의 경제 지원에 굴복한 것으로 의신을 샀고, 심지어 마르코스 지지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14년간 독재정치가 펼쳐졌는데, 이 시기에 학살과 고문이 잇달아 벌어지고 경제도 파탄이 났다. 계엄령을 근거로 야당인사들과 민다나오 섬의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금지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제한했으며, 의회와 언론을 해산시켰다. 마르코스는 야당 정치인들을 투옥시키고, 군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어 군부독재를 펼쳤다. 이같은 폭압정치로 3,257명 정도가 사법살인을 당하고, 3만 5천여명이 고문 피해를 입었으며, 7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투옥 당했는가 하면 약 12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경찰과 군에 의해 임의로 체포되거나 구금당하는 인권 침해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의 정치가 독재의 사슬에 갇혀 있을 때 경제는 족벌 독점체제로 성장이 뒤처졌다. 한 때는 일본,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아시아권에서 부국의 대열에 있었으나, 마르코스의 독재정치와 함께 필리핀의 경제는 급속히 퇴보했다.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 여사의 사치와 더불어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와 산업체의 요직에 친인척을 임명하여 비난을 샀으며, 마르코스도 자신의 친척이나 자녀들을 요직에 앉혀 측근정치를 실시하여 결국은 부정부패가 판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국민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커지면서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필리핀 경제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일을 했을까?

이미 1962년부터 실시한 2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전력 및 석탄 확보, 사회간접자본시설의 확충, 식량의 자급자족, 공업화 추진이라는 목표를 두고 국가의 힘을 쏟았다. 1972년부터 추진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경제 자립과 중화학 공장 건설을 목표로 두고 제1차 석유파동 극복, 근로자의 해외 파견, 중화학 공업화 선언(1973년), 최초로 고유 모델 자동차 생산(1975년) 등을 실시했다.

이러한 경제개발 추진을 통해 박정희가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던 1963년부터 1979년까지의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6%라는 놀라운 실적을 남겼다. 같은 시기에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에서 1,800달러로 30배 상승하였고, 수출액은 1963년 8천 600만 달러에서 150억 5,500만 달러로 무려 174배나 폭등하였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지만, 필리핀은 2017년 기준 1인당 GDP 3,280달러로 세계 123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작년 기준으로 3만 2,775달러와 비교해 본다면 필리핀은 우리의 10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금년 3월에 세계적인 이슈로 올라온 베네수엘라 사태를 보면서 국가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엄중한지 다시금 생각해 보면서 1965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 총리를 역임한 리콴유가 필리핀의 마르코스를 비판하며 던졌던 말을 더올려 본다.

“잘못된 지도자는 첫 번째 임기에 정권을 망치고, 두 번째 임기에 나라를 망친다."

대규모 정전 사태로 대중교통이 마비된 카라카스 시내 (자료 출처 : 연합뉴스)
정전사태로 식수난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주민들 (자료 출처 : 연합뉴스)
대규모 정전 사태로 대중교통이 마비된 카라카스 시내 (자료 출처 : 연합뉴스)
대규모 정전 사태로 대중교통이 마비된 카라카스 시내 (자료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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