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청구권 그리고 독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4년 사망한 여운택씨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판결은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 기초한 정치적 타결을 정면으로 뒤집는 취지여서 한일관계의 중심축을 뿌리째 흔드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 2015년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파기’ 논란으로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내려진 이번 판결로 한일관계는 당분간 경색국면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일제에 의한 35년여의 식민지 지배가 분명하고, 그 식민지배 시기에 강제지용 당한 피해자에 대한 배상문제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문제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이 한일관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먼저 1965년 타결된 한일기본조약을 살펴 본다.
미국 주도하에 1951년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교섭은 14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1965년 마무리되었다.
1965년 6월 22일 서명되고 같은 해 12월 18일 발효된 한일기본조약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고, 7개조로 구성된 기본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조약의 부속협정으로는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진실로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 제2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청구권 문제의 향방이 갈린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무효’라는 규정을 통해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체결 시점으로 소급되어 효력을 상실함으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가 불법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측에서는 ‘무효’ 앞에 ‘이미’라는 부사어구를 붙였기에 일본과 연합국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8일 서명, 1952년 4월 28일 발효) 발효 시점에서 이미 무효가 되었으므로 35년여의 일제 식민지배는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개인적인 청구권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모두 소멸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추종하는 일본의 보수적 판사들은 한국의 위안부들이나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 및 기업을 상대로 일본 사법부에 소송을 제기해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던 아리미쓰 겐(有光健·67세) 일본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는 2014년 6월 2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기회에 일본이 ‘식민지배 배상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근거인 한일협정을 대체해야 합니다. 한국인 위안부와 징용자, B·C급 전범 유골 반환, 문화재 반환을 포함하는 수준의 새로운 협정이 필요합니다.”고 하면서, “일본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한국 정부가 더 정교하고 끈질기게 일본과의 협상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하였다.
한일기본조약의 체결과정을 되돌아보면, 당시의 우리나라의 상황이 너무도 열악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남북 분단이 이루어지고, 곧이어 벌어진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결로 시작된 냉전체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1960년대 들어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문제 해결이라는 절박한 상황은 미국의 강력한 중개와 맞물린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반발 시위가 벌어지는 곡절을 겪으며 다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조약 체결상의 곡절이 있었을 지라도 조약은 국가 간의 중요한 약속인 만큼 서명하고 발효된 결과에 승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약 내용상의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이를 바로 잡는 것 또한 중요하다.
바로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에 있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핵심으로 이해된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일제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그동안 일본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 징용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과 배치된다.
우리 정부도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 한일국교정상화 교섭과 관련한 외교문서 공개과정에서 민관합동위원회가 내린 결론에 따라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같은 우리 정부의 입장과 다른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만큼 정부로서도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과제가 생겼다.
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고노 외무상은 “한국 대법원 판결은 수교 이후 양국관계의 법률적 기반이 된 한일 청구권협정을 일방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의 단호한 조치를 요구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후 고노 외무상은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하여 일본 정부의 입장이 담긴 외교문서를 직접 전달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미 밝혔지만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은 과거사 문제를 불분명하게 처리하며 마무리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의 여파가 향후 어떻게 결론지어질지 모르지만 과거사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구축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중요한 교훈이라 하겠다.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과정에서 독도문제 역시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한일회담 기간중 양국은 총 59회에 걸쳐 왕복외교문서를 교환하였다. 이중 한국이 24회, 일본이 35회에 걸쳐 서로의 주장에 대한 반론 또는 재반론을 주장하였다. 이들 59회의 왕복외교문서 중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한 주장은 4회에 그쳤다. 만약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독도문제를 좀 더 심도있고 분명하게 다루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불편함은 없었을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한일관계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깔끔한 청산을 바탕으로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가 구축되기를 기대한다.

나사에서 찍은 한국과 일본-자료 출처  네이버 이미지
나사에서 찍은 한국과 일본-자료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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