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지켜온 사람들

독도의 날(10월 25일)을 나흘 앞둔 10월 21일 독도에서 생활하고 있던 독도 주민 김성도씨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고 김성도씨는 부인 김신열씨와 함께 지난 1991년 11월 독도로 주소를 옮기고 지금까지 독도에서 생활해왔다.
독도는 봄과 여름철 어로작업을 하는 시기에는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그 이외의 계절에는 생활하기가 불편한 섬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시기 이사부에 의한 독도 점유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독도에서의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토 주권에 대한 의식이 싹트면서 독도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이  10.21 세상을 떠난 고 김성도씨에게 이르기까지 여러명 있었고, 이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고 김성도씨의 명복을 빌어드리며, 그동안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의 면면을 되돌아 본다.

가장 먼저 독도를 우리의 소중한 영토로 인식하도록 선구자적 역할을 해준 사람은 조선 숙종시기의 안용복이다. 당시 울산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던 안용복은 부산에 있는 왜관에 자주 다니면서 일본인들과의 잦은 접촉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 사람들이 몰래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와 벌목과 불법 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당시 일본과의 유일한 통로인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1693년과 1696년 두차례에 걸쳐 독도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찾아 들어가 에도 막부에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게 된다. 안용복의 주장에 따라 1696년 에도 막부는 죽도(당시의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리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인정하였다.
안용복이 돌아온 후 조선 조정에서는 불적으로 국경을 벗어나 일본으로 들어가 소송을 하였다는 행위를 두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안용복으로 인하여 일본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확약받은 공적이 있으므로 사형은 안된다는 차원에서 유배형을 받았다.

다음으로는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6·25 전쟁 직후부터 독도를 지켜낸 홍순칠씨를 생각해본다.
홍순칠씨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국군에 입대하여 함경북도 청진(淸津)까지 진격하였으나, 원산 근처에서 전상을 입고 1952년 7월 특무상사로 전역한 후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큼을 타서 일본이 독도를 노리는 걸 보고 직접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1953년 4월, 홍순칠은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다. 독도의용수비대는 군인 출신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으로 구성하였다.
이들은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하고는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고, 7월 12일엔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경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순시선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에는 국회에서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관을 경비대로 독도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하지만, 6․25전쟁의 영향으로 충분한 지원을 할 형편은 부족하여 경비임무를 맡은 인원은 5명뿐이었고 상주를 위한 숙소는 독도수비대에 의존하였으며, 준비된 장비도 많진 않아 독도의용수비대는 계속 독도를 지켰다.
1954년에는 독도 동도(東島) 바위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자를 새겨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8월 23일에는 다시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하지만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PS9, PS10, PS16함이 항공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였으나 이때도 독도의용수비대는 총격전을 벌여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 전투로 일본 쪽에서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고 독도 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정부도 독도 수비를 지원할 여력을 갖추면서 독도의용수비대는 경찰에 독도수비를 인계하였다. 현재 독도의용수비대의 정확한 활동기간에는 논란이 있지만, 독립 직후의 혼란기에 독도를 지켜낸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의 정신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홍순칠씨는 1966년에는 5등 근무공로훈장을 받았고, 1986년 별세한 후에는 1996년에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었다.  

다음으로는 초대 독도박물과 관장을 지낸 사운 이종학씨를 생각해 본다.
이종학 관장은 1927년 1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고,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끝으로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호 ‘史芸’은 ‘芸’이라는 글자가 ‘향풀 운’자여서 ‘사운’이라는 의미는 ‘역사의 향풀’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종학 선생의 아호가 ‘史芸’이었던 데서 기인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그는 29세가 되던 1955년 종로5가에 권독서당을 세워 운영하다가, 2년 후에는 연세대 근처에 연세서림을 세워 놓고 일반적과 함께 고서를 취급하면서 서지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종학 관장은 1981년 11월 첫 일본 방문을 시작으로 2002년 11월 타계하실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50여 차례나 일본을 드나들었다.
일본의 주요 도서관을 찾아 독도를 비롯하여 한국과 관련있는 자료라고 생각되면 분량이나 중요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수집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대외비나 공개가 곤란한 자료를 접하게 되면 일본의 관계 직원들에게 아부 아닌 아부를 해야만 했다. 중요한 자료를 처음 접한 뒤 열람은 가능해도 복사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몇 번이고 찾아가보지만 쉽게 복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여러번 경험한 이종학 선생은 일본을 방문할 때면 의례 선물용 김, 멸치, 인삼제품 등을 준비해 갔다. 일본의 공무원들은 현금을 받는 것은 극도로 꺼리지만 한국의 특산품 선물에 대하여는 의외로 선호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복사가 쉽게 허용되지 않는 자료를 접하게 되면 해당 직원과 여러차례 접촉한 뒤 준비해간 한국 특산품 선물을 주면서 결국에는 자료를 얻어오곤 하셨다.
사운 이종학 선생은 2002년 11월 23일 오후 2시 수원에 있는 아주대 부속병원에서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전재산을 털어 국내외에서 온갖 자료를 수집하여 때로는 관련 학계를 위해, 때로는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자료를 내놓았던 서지학자로 사셨다.
그는 지난 1997년 독도박물관 건립에 헌신한 후 잠시 박물관장직을 맡기는 하였지만, 그 흔한 ‘전문위원’이니 ‘명예박사’니 하는 감투 하나 탐하지 않으셨다.
선생은 힘들여 수집한 자료의 공개와 제공에 대해 무척이나 관대하셨다. 일부에서는 언론플레이를 잘한다고 비판도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선생이 모아 제공한 자료들 덕분에 독립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 현충사 등에서 ‘역사의 향기’가 지속적으로 뿜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사료 수집에 몸바치시고, 그에 걸맞는 변변한 대접 한 번 받지는 못했지만 죽어서도 땅 한 평 차지하기를 마다하셨다. 선생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뼛가루를 독도 앞바다에 뿌려달라”며 죽어서도 독도의 수호신이 되고 싶다고 하셨단다.
이 선생의 유해는 울릉도에 있는 독도박물관 옆 언덕에 모셔졌고, 2003년 6월 12일 ‘한줌 재 되어도 우리땅 독도 지킬 터’라고 쓰여진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고서적과 사료·지도·사진 등 1만 9,836점이 2004년 1월 수원시에 기증되었고, 2008년 10월 수원박물관 내 사운이종학사료관 속에서 ‘역사의 향풀’로 오늘도 숨쉬고 있다.

다음으로는 독도 1호 주민이었던 최종덕씨를 생각해본다.
대구가 고향인 최씨는 1963년 처음 독도에 들어간 뒤 1965년 서도에 있던 어민숙소 자리에 직접 토담집을 짓고 조업을 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81년에는 주민등록을 독도로 옮겨 법적으로 독도 최초 거주자가 되었다. 
이후 최씨는 서도 ‘물골샘’ 방파제와 동도 정상 헬기장 공사 등에 참여하는 등 독도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으나 1987년 9월 뇌출혈로 숨졌다.
최씨가 사망하자 1980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독도와 울릉도를 오가며 12년간 생활을 함께했던 최씨의 딸 최 은채(옛이름 최경숙)씨는 2008년부터 독도에 아버지 최종덕씨의 기념석을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독도 최종덕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중인 은채씨의 요구에 대해 2016년 1월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은 최 씨 아버지 기념석 설치를 위한 국유재산 사용(면적 1㎡)을 허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6월 독도 최초 거주자의 딸이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석을 독도에 설치했다. 독도 최종덕기념사업회는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번지 서도 옛 문어건조장에 고(故) 최종덕 씨 기념석을 세웠다.
기념석은 가로 60㎝, 세로 50㎝, 높이 18㎝ 크기의 오석 재질이며, 앞면에는 ‘영원한 독도 주민 최종덕, 독도 거주: 1963∼1987년’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최은채씨는 “아버지가 독도에 오랜 기간 살았지만 흔적이 없어 안타까웠다”며 “기념석 설치로 아버지의 독도 사랑은 물론,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사실도 널리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독도 주민 2호인 조준기씨를 생각해본다.
조씨는 해병대로 울릉도에서 복무한 것이 인연이 되어 독도 주민이 되었다. 조씨는 바로 1호 주민인 최종덕씨의 딸인 최은채씨와 결혼을 하여 최종덕씨 사위로도 알려져 있다.
조씨는 2013년 4월 22일 향연 59세를 일기로 암투병중 사망하였다. 조씨는 1987년 작고한 최종덕씨에 이어 1986년 7월 주소를 독도를 옮겼다.
독도에서의 생활이 어려워 1994년 생업을 위해 뭍으로 나온 조씨는 노래방을 개업했을 때에는 ‘독도 노래방’, 식당을 열었을 때는 ‘독도 홍합 돌솥밥’이라는 상호를 썼을 뿐만 아니라 업소 내부는 온통 독도 사진으로 장식하는 등 독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조씨는 독도에서 생활하면서 태어난 아들 강현씨의 출생지를 독도로 신고하여 고향이 독도인 최초의 한국인이 되도록 하였다. 
조씨는 지난 2007년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에서 실시한 ‘국민추천 정부포상자’에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독도 3호 주민이 바로 10.21 타계한 김성도씨다.
김씨의 공식적인 독도 생활은 1991년부터이지만 사실은 1970년대 초반부터 1호 주민이었던 최종덕씨를 도와 그때부터 독도에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독도 3호 주민이 된 김씨는 독도 1호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다. 김씨는 ‘독도 1호 사업자’이자 ‘독도 사상 첫 국세 납부자’다. 김씨는 2014년 국세청에 독도 주민 최초로 부가가치세 19만3000원을 납부했다. 김씨는 지난 2009년 3월 독도 주민으로 부가가치세 면세인 수산물 소매업을 개업한 이후 2013년 5월 부가가치세 과세사업인 관광기념품 소매업으로 전환, 독도 선착장에서 방문객들에게 독도 티셔츠 등 기념품을 팔았다. 김씨는 2014년과 2015년, 2018년 3차례 국세를 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매출이 적어 부가세 납부를 하지 못했다. 또한 김씨는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의 22번지에 사는 주민으로 독도에서 처음으로 투표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2006년 5월 25일 독도에서 첫 부재자 투표(지방선거)를 했다. 김씨는 민간 전화를 독도에 처음 개통한 주민이기도 하다. 지난 2010년에는 통계청장이 직접 독도를 찾아 독도 주민 김씨에 대한 첫 인구조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독도는 독도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녔던 보통 사람들에 의해 지켜져 왔다. 말로만 외치는 독도가 아니라 온몸으로 끌어안고 독도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제4호 독도 주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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