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기억합시다(1)…안용복

정연철 박사

안용복은 부산 동래 사람이다.
그가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었다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숙종실록 기록 참조)
오카지마 세이세이(江嶋正義)의 [竹島考]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그가 착용하고 있던 호패에 그의 거주지가 부산 동래부 좌지천 1리(현재의 부산 동구 좌천동) 제14통 3호로 되어 있다.
출생년도는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그가 지녔던 호패의 기록, 죽도기사의 내용, 그리고 원록각서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1654년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부산의 바닷가이고, ‘왜관’이 가까이 있어서 일본인과의 교류가 자연스러웠기에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15세기 초에 창설되었던 왜관은 조일간의 격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증설, 이전 혹은 폐쇄의 반복과정을 거쳐 1678년 두모포(지금의 부산 수정 2동)에서 초량으로 옮겨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일외교와 무역업무가 이루어진 장소가 부산에 있는 왜관으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왜관에 상주하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왜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담케 함으로써 왜관은 대일교섭에 있어서 접대·무역·숙박장소로서의 기능을 모두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용복은 오랜 세월동안 왜관을 드나들며 왜인들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왜관 내의 여러 가지 사정을 상세히 알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경상좌수영 전선의 노를 젓는 수졸인 능로군(能櫓軍)이 되었다. 능로군은 평상시에는 어업에 종사하다가 비상시에는 전선에 승선하는 양인이나 천인들로 구성되었던 군대였다.
그런 그가 왜관을 자주 드나들면서 대마도가 일본과 조선 사이의 모든 교역을 오랫동안 독점하면서 자행되는 부정과 비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버님이 안계셨던 가정환경 때문에 홀어머니는 안용복이 행여 남들에게 아비없는 자식이라 상처받을 것을 염려하여 평소의 생활태도에 매우 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는 올바르지 못한 언행이나 행동에 대하여는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왜관에서 만나는 일본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울릉도와 독도에서 제멋대로 고기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반드시 울릉도로 찾아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일본인들을 혼내주려 마음먹었다. 게다가 바닷가에서 자란 탓에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해산물에 대한 조예가 깊었기에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행하고 있다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1693년 봄, 안용복이 우리 나이로 4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울릉도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비록 조정에서 해금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미 작정한 바가 있어서 안용복은 울릉도행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평소 부산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이 울릉도에 가면 부산에서 보다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서인지 울릉도로의 고기잡이에는 40여명의 어부들이 동행했다. 왜관을 드나들면서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일본인들을 꼭 만나야 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울릉도에 배를 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인들의 배가 들어왔다. 그렇게 마주한 일본인들이 숫자가 많은 것을 믿고 큰소리치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일본어에 능통했던 안용복이 나섰다. 감히 여기가 누구 땅인 줄도 모르고 큰소리치느냐고 맞서자 일본인들이 막부의 허가를 얻었노라고 대답해 왔다. 안용복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무시하자, 일본인들은 상당기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고기잡이를 해왔는데 왜 방해하느냐고 맞섰다.

안용복 역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이번 기회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오는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안용복은 그 허가를 내준 곳이 어딘지 직접 쫓아가서 따지겠다고 하였고, 일행중 체격이 좋고 가깝게 지냈던 박어둔을 데리고 일본인들의 배를 타고 은기도로 갔다. 은기도에서 안용복은 문제의 도해 허가와 관련하여 울릉도와 독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영토이거늘 어찌 일본에서 허가를 내어 줄 수 있느냐며 伯耆州와 에도 막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런 항의가 잘 받아들여진 덕에 안용복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후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에도막부로부터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내용의 서계를 받았으므로 안용복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일본에 머무른 기간이 몇 개월이 지나면서 대마도주는 안용복이 울릉도를 거쳐서 伯耆州에 들어가 울릉도와 독도 문제로 막부와 의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대마도주는 안용복이 울릉도로의 도해문제를 따지는 것보다 자신들의 부정과 비리를 너무도 상세하고 알고 있다는 점에서 에도막부에 그같은 사실을 알려 줄까봐 잔뜩 긴장하였다. 그리하여 대마도주는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로 출발하는 나가사키(長崎)항에 손을 써 놓았다. 안용복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타나거든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을 상세히 조사하여 대마도에 해가 되는 행위는 없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안용복이 나가사키에 나타나자 이들은 안용복을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자신들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로 인하여 대마도와 함께 막부로부터 질책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안용복은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을 대마도주가 얌전하게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다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 만은 숨기려 했으나, 일본에서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나가사키와 대마도의 강압적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서계를 확인한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부산 왜관에다 3개월이나 억류시켜 놓고, 막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계책을 궁리하였다. 그러한 궁리 끝에 조선 조정이 울릉도에 대해 오랫동안 해금정책을 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외교문서를 통해 울릉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받게 하려 했다. 그렇게 된다면 에도막부가 안용복에게 서계로 인정해준 울릉도를 되찾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공적이 높아짐으로써 지금까지 저지른 부정과 비리도 큰 문제없이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마도에서는 그해 겨울 안용복과 박어둔을 돌려 보내면서 “귀역의 바닷가에서 고기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 올 봄에 어민 40여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 어민을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그 섬에 결단코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禁制를 보존하여 두 나라의 交誼로 하여금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는 서계를 보내왔다.

안용복이 봄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겨울이 되어서야 돌아 왔으니, 거의 1년 만에 부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안용복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서계를 빼앗은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울릉도를 일본의 땅이라고 하는 서계를 조선 조정에 보내는 대마도주의 행위가 너무도 괘씸했다. 그리하여 그간에 벌어진 사건의 자초지종을 동래 부사에게 말하였으나, 부사는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다음해인 1695년 조정에서 보낸 접위관이 동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용복은 즉시로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얘기했지만, 역시 믿어주지 않았다.
안용복은 크게 실망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올바른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일본에까지 쫓아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호소하여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안용복은 다시금 결심하게 되었다. 조선의 조정에서 믿어주지 않는다면 일본 조정을 찾아가서 분명하고 확실한 대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일본행은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으로 가는 길은 절대로 대마도를 경유하지 않을 것이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들어가리라 마음을 굳혔다.
불행중 다행인지 자신의 귀국과 더불어 대마도로부터 접수한 서계로 인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그 서계에 대한 답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영의정 남구만의 건의로 울릉도로의 수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만, 울릉도의 소속과 명칭을 둘러싸고 벌인 조선 조정과 일본 왜관 사이의 외교 공방이 대마도의 기만행위에 기인한 것인지를 조선 조정이 조금씩 느껴가고 있음도 다행이었다.

다시금 일본으로 들어가 울릉도 문제를 결론지으려는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려고 ‘조선팔도’ 지도도 준비하였다.
드디어 1696년 5월 안용복은 흥해 사람 劉日夫, 영해 사람 劉奉石, 평산포 사람 李仁成, 낙안 사람 金成吉, 순천 스님 雷憲·勝淡·連習·靈律·丹責, 그리고 연안 사람 金順立 등 11명이 배에 올라 탔다. 안용복은 이들에게 지난번 일본에 갔다온 사정을 상세하게 말해주었고, 이들 역시 기꺼이 안용복과 동행하기로 하였다.
울릉도에 도착해 보니, 지난번처럼 왜선 역시 많이 정박해 있었다. 지난번의 경험이 있었던 안용복이 먼저 앞장서서 크게 말하였다.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대해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오늘날의 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本所로 돌아갈 것이다.”고 한다.
이에 안용복은 “송도는 자산도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고 꾸짖자 왜선들은 울릉도를 떠났다.
안용복 일행이 다음날 새벽에 배를 몰아 독도에 갔더니 왜인들이 가마솥을 벌여 놓고 있기에, 그가 막대기로 쳐서 흩뜨리고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뜻한 바 있어 안용복도 곧 배로 왜선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백기주의 은기도에 이르렀다. 그 때 도주가 그곳에 도착한 이유를 물어 오기에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하고 關白의 서계까지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답하였다.

이에 대해 도주는 마땅히 백기주에게 轉報하겠다고 대답해 놓고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안용복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배를 타고 곧장 伯耆州로 가서 ‘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안용복은 푸른 철릭을 입고 검은 포립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같이 간 일행들도 모두 말을 타고 갔다.
안용복은 도주와 청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일행들은 모두 중계에 앉았다.
도주가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묻기에, 안용복은 “전일 두 섬의 일로 서계를 받아낸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대마도주가 서계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 세번 差倭를 보내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고 답변하였다.
한편, 안용복이 다시금 백기주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대마도에서는 자신들의 비리는 물론 지난번 서계문제도 있어서, 이를 무마하기 위해 대마도주 아버지가 부랴부랴 안용복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백기도주의 허락을 얻은 안용복이 필체가 좋은 이인성으로 하여금 疎를 지어 바치게 하자, 대마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에게 간청하여 “이 소를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중한 죄를 지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며 애원하였다. 비록 이인성이 작성한 소를 관백에게 품의하지는 못하였지만, 전일 지경을 침범한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이어서 안용복에게는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國書를 만들어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고 다짐하였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이라는 확실한 답을 얻은 안용복은 백기주 측에서 제공하려는 귀로의 편의를 마다하고 스스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을 대마도를 경유하여 돌아올 경우, 지난번처럼 고초를 겪을 것이 우려가 되었다. 그리하여 안용복은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자기 발로 걸어서 강원도 관찰사를 찾아가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안용복의 활동에 대하여 일본 학자들은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죄를 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의도적으로 폄훼하였다. 그러나 2005년 5월 일본 시마네현의 오키도에서 안용복의 2차 도일시 안용복 등을 조사한 심문보고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보고서에 의하면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로 명백히 입증된다. 이 보고서에는 안용복 등의 품계와 관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용복이 소송을 위해 도일하였다는 사항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안용복은 제1차 도일에서 돌아오면서 나가사키와 대마도에서의 강박 및 홀대가 염려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일본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경로를 보면 돗토리성(백기주)에서 곧바로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이는 제1차 일본행에서 얻어냈던 서계를 대마도 탈취하였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선택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안용복을 강원도 관찰사는 한양으로 보냈고, 안용복이 ‘사사로이 다른 나라에 가서 외람되게 나라일을 말한 죄’에 대하여 비변사의 심문과 더불어 조정에서는 그의 치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숙종 22년(1696년) 10월 13일 논의에서 영돈녕 윤지완은 대마도가 에도막부와의 직접 교섭을 못하게 하였던 것을 안용복이 직통의 길을 열었으므로 그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교활한 왜인들만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형을 반대하였다.
영중추부사 남구만은 대마도가 울릉도를 죽도라고 칭하면서 에도막부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핑계대면서 조선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시키려 농간을 부린 것이 안용복 때문에 모두 탄로 났으니 안용복에 대한 처벌은 천천히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면서 상, 중, 하의 세가지 방안을 제안하였다. 지사 신여철은 안용복의 행위는 국가에서 못하는 행위를 그가 능히 하였으므로 그 공로가 죄과를 덮을 만하니 사형에 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좌의정 윤지선은 안용복을 죽이지 않으면 간사한 백성 중에 다른 나라에서 일을 일으키는 자가 많아질 것이니 마땅히 안용복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왕은 영의정이 출사한 후에 처리하라고 하여 안용복의 처벌에 대한 결정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조선 조정에서 처리할 안건이 많아서인지 안용복 치죄에 관한 논의는 해를 넘겨 숙종 23년(1697년) 3월 27일의 사료에 나오고 있다. 이날 숙종 임금이 대신들과 비변사 관원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영의정 유상운은 안용복의 감형을 건의하였다. 그 요지는 안용복을 사형에 처해야 하겠지만, 남구만과 윤지완이 모두 그를 가벼이 죽여서는 안된다고 반대하고 있고, 또 대마도에서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인정하고 왜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시켜 우호에 틈이 생기지 않겠다고 자복해 온 것은 대체로 안용복의 공 때문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국왕도 이러한 건의에 동의하여 안용복에 대한 사형을 감형하여 유배를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사헌부에서는 여러번 국왕에게 안용복의 사형을 요청했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안용복이 유배에 처해진 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안용복의 1차도일 활동으로 에도막부가 1696년 1월 28일 독도 도해금지를 결정했다는 사실이 조선 조정에는 해를 넘겨 1697년 1월에야 전달이 되었고, 도해허가를 받아 울릉도를 왕래하고 있었던 大谷 및 村川 양가에도 1696년 8월에야 전달되었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외무성에서는 홈페이지에서 안용복이 2차로 일본에 갔던 1696년 5월에는 일본이 그해 1월에 도해금지를 결정한 후의 일이어서 大谷 및 村川 양가는 모두 울릉도에 도항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안용복의 진술 내용에는 의문점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의 교통편과 시대상황, 대마도의 농간 등을 고려해 볼 때 안용복의 진술이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독도와 관련하여 비록 민간인의 신분이었지만 그 어느 외교관 못지 않은 역할을 하였던 안용복의 영혼이 오늘의 독도를 과연 어떻게 지켜보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독도에 관심이 있는 국민이라면 적어도 안용복이란 그 이름 석자 만은 꼬옥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한국미디어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