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는 절강성(浙江省)의 중심도시로 상하이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80㎞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늘에는 천당이 있으며 땅에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바로 그 항저우에서 지난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제19회 아시안게임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항저우는 관광지로도 명성이 높은 도시이다. 특히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서호(西湖)’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으로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서호에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당나라 시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년)와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의 이야기가 더해져 관심을 높여준다.

백거이는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6세 때 시를 지었다고 한다. 당시에 시행된 과거시험 통해 출세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 백거이는 29세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섰다. 관직에서는 순탄한 길을 걷기도 하였지만 원화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 관련 상소를 올린 문제로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성 구강시)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중앙으로의 복귀를 거절하고 48세 때인 824년 항저우 자사를 맡아 3년간 재임하였다.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서호에 건설한 백제(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蘇東坡)가 만든 소제(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다.

소동파는 중국을 대표하는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당송8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22세때 송나라의 도읍이었던 변경(汴京)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급제하였고, 과거 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소동파의 관직 생활은 당시 급진개혁을 추진하던 왕안석(王安石)과 대립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중앙에서 밀려나 지방 곳곳을 떠돌다가 황제가 서거하고 황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50세 때인 1087년 중앙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정적들의 모함과 중상모략이 극심해지자 스스로 사직을 청한 후 1089년 항주 태수로 복귀하였다. 당시 항주는 인구 50만명의 도시로 홍수와 식수문제, 식량과 질병문제가 만연한 상황이었다. 소동파는 항주에 중국 최초의 공립병원인 ‘안락방(安樂坊)’을 설치하고, 엄청난 구제사업과 토목공사를 실시하는 등의 활동으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도시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서호 정비도 하였는데, 호수를 가로지르는 둑인 소제(蘇堤)를 만들기도 하였다.

소동파와 관련하여 ‘동파육(東坡肉)’이라는 요리가 유명하다. 이는 소동파가 1077년 쉬저우(徐州) 지주(知州)로 재직시 홍수가 나자 민군을 이끌고 제방을 쌓아 위기를 넘겼다. 이에 주민들이 소동파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가져다 주었는데, 소동파는 이를 홍소육(紅燒肉, 중국에선 ‘홍사러우’로 빨갛게 구운 고기음식)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자신들이 표한 감사의 뜻을 소동파가 다시 돌려주었다는 의미로 홍소육을 회증육(回贈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089년 소동파가 항저우로 다시 부임한 뒤 폭우가 내려 주변 마을이 침수되었을 때 소동파의 현명한 대처로 위기를 넘겼다. 이후 서호 주변에 제방을 쌓고 다리를 건설해 수재를 예방하도록 하였다. 이에 항저우 주민들이 소동파가 쉬저우에서 홍소육을 즐겨 먹었다는 소문을 듣고 돼지고기를 선물로 보냈다. 이렇게 받은 선물 고기를 소동파는 정사각형 모양의 홍소육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부터 소동파가 만든 홍소육이라 하며 ‘동파육’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동파육은 통삼겹살에 진간장 등의 향신료를 넣고 조리한 중국 대표 음식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항저우는 서호 이외에 중요한 볼거리가 있다. 바로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大運河)가 그것이다. 대운하는 수나라 양제 시기인 604년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긴 후 605년 대운하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대운하 공사는 계속되었고, 명나라 영락제 시기인 1359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6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운하는 19세기에는 몇 차례의 홍수로 제방이 무너져 큰 문제가 있었고, 1934년 국민당 정부가 칭장강과 장강 구간의 운하를 수리했다. 1958년에는 공산당 정부가 600톤급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수리했고, 현대식 갑문과 64㎞의 운하를 새로이 연결하여 오늘의 대운하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1,794㎞에 이르는 대운하는 교통이 불편했던 중세시기에 수도와 항저우를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오늘의 항저우는 인구 900만명의 도시로 1992년 개방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중국의 속담에 ‘소주(蘇州)에서 태어나, 항주(杭州)에서 살고, 광주(廣州)에 가서 일하고, 유주(柳州)에서 죽으라’는 말이 있다. 비록 항주에서 살지는 못 할지라도 항주를 한 번 다녀보면 어떨까.

뇌봉탑에서 내려다본 서호(西湖) 풍경 (필자 촬영)
뇌봉탑에서 내려다본 서호(西湖) 풍경 (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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