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6월 25일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은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치하에서 해방된 후 불과 5년이 지나지 않은 해였다. 당시 미국과 소련에 의해 신탁통치 결의가 있었고,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남북한이 반탁과 찬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출범시키며 사회는 혼란스럽기만 했었다. 6·25 전쟁은 같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 여진으로 한반도가 여전히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6·25 전쟁에 대하여 필자 나름대로 정리를 해본다.

<6·25 전쟁 개요>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스탈린의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의 북한군이 기습적인 남침을 시작하면서 발발하였다. 북한의 남침은 우리나라와 미국의 기록, 그리고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후르시코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휴전 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간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남기며 일단락 되었다.

먼저 군사 분야 피해를 살펴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의하면 전쟁 기간중 국군 사망자는 13만 7,899명에 달하고, 부상자는 45만 742명이며, 포로는 8,343명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기간중 경찰도 3,131명이 전사했고, 부상자는 6,760명이며, 7,084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군사정전위원회 편람 기준으로 전쟁 기간중 북한군 사망자는 52만면이고, 실종자 및 포로는 12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지켜주고자 6·25 전쟁에 참가한 유엔군은 연인원 기준으로 195만 7,616명이었는데 이중 사망자는 3만 7,902명이고, 부상자는 10만 3,460명이라고 한다. 더하여 실종자가 3,950명이며 포로는 5,817명이라고 한다.

1950년 가을 이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를 바꾼 중공군의 피해를 보면 사망자 14만 8,600명, 부상자 79만 8,400명으로 추정된다.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민간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한 지역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4,663명이고 부상자는 22만 9,625명이었다. 그리고 북한 지역 민간인 피해도 사망자 28만 2,000명이고 실종자도 79만 6,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간인 피해 부분에서 북한의 민간인 실종자가 79만 여명으로 나타난 것은 북한에서 남한지역으로 월남한 주민들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찾기 신청자는 2022년 12월말 기준으로 총 13만 3,675명이다. 이 중 9만 1,051명이 사망하여 생존자는 4만 2,62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산가족 당사자들의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남북간 이산가족 교류는 2018년 이후 중단된 상황이다. 비록 직접적인 상봉은 어려울 수 있으나, 이제라도 전체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전쟁의 명칭 문제>

일반적으로 전쟁 명칭은 전쟁의 주체를 기준으로,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기준으로 그 명칭을 쓴다. 그런데 6·25 전쟁은 발발한 날짜를 전쟁의 이름으로 쓰는 특이한 형식이다. 필자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이 전쟁을 6·25 사변 혹은 6·25 동란 등으로 불렀었다. 이를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면서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약칭 ‘전승절’)이라고 포장하여 매년 거대한 행사를 거행한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이 전쟁을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 간행물 ‘6·25 사변 피살자 명부’와 같은 해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 간행물 ‘한국전란지’에서 보듯이 ‘전쟁’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이후 1973년 정부에서 제정하는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는 ‘6·25 사변일’로 규정하였다가, 2014년 3월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하였다. 우리는 이 전쟁을 6·25 전쟁이라고 지칭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Korean War’라는 표현으로 통용된다. 이를 한국전쟁이라고 번역하면 무난하지만,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이 아니라 ‘조선전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완벽한 표현은 아니다.

그 표현이 어떠할지라도 필자는 ‘6·25 전쟁’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을 정리하면서>

전쟁은 김일성의 북한군에 의한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유엔군(16개 회원국)과 중공군이 참전하여 국제전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완전한 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조인을 거부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로 우리나라는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휴전협정은 유엔군 총사령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등 3자에 의해 체결되었다.

전쟁 당사자인 우리나라가 조인하지 않은 휴전협정이 지금 남북한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다. 과연 이같은 상황이 올바른 방향인지 의문이다. 종전선언이 한동안 회자되었지만, 종전선언이든 평화협정 체결이든 이제는 전쟁 당사자였던 남북한이 이 불완전한 분단의 문서를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본인들 의사와 관계없이 수십 년간 부모, 형제를 비롯한 가족들의 생사 조차 확인하지 못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애끓는 마음을 이제는 따뜻하게 보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2018년 8월 이산가족 상봉 형장 모습
2018년 8월 이산가족 상봉 형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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