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 1호분(墳’)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그리고 일본의 역사 왜곡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국립광주박물관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이용될 우려로 인해 30년간 공개되지 않은 전남 함평 예덕리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덕 1호분‘ 발굴조사 결과 보고서를 이달 말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분출토 유물에서는 백제와 왜(倭)의 문화가 혼재된 양상이 확인되었으며, 조사에 참가한 한-일 고고학자들은 20~3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은 한반도에 진출한 왜인(倭人)이 묻혔을 것으로 보는 임나일본부설의 시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1991년 3월 도굴 흔적이 발견되어 첫 조사가 이루어진 ‘신덕 1호분’은 일본의 고대 무덤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전형적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앞쪽은 네모지고 뒤쪽은 둥근 봉분 형태의 무덤)이다. 이러한 봉분 모양 탓에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었다고 한다.

필자는 평소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임나일본부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역사 왜곡이다. 하여 필자는 임나일본부설 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역사왜곡 문제 관련 일본측 인사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임나일본부설을 살펴보자.

임나일본부설은 고재 일본의 야마토(大和) 왜가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200여년간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경영하였다는 설이다. 서기 369년부터 562년간의 시기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신라는 17대 내물왕(356~402년)부터 24대 진흥왕(540~576년), 백제는 아화왕(392~405년)부터 위덕왕(554~598년), 그리고 고구려는 광개토왕(391~413년)부터 평원왕(559~590년)까지의 재위 시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왜곡된 논설이 나온 19세기까지 이와 관련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라는 국호가 처음 사용된 것이 670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년) 12월 조에 “왜국(倭國)이 국호를 바꿔 일본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중국의 구당서 ‘동이전(東夷傳)’에서도 670년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배경에 대해 “일본국은 왜의 다른 명칭이다. 이는 그나라가 해뜨는 곳에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요.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라 함은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로 스스로 싫어하였다. 그런 이유로 일본이란 이름으로 고쳤다(“日本國者倭之別稱也 以其國在日處故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故改爲日本)”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왜국에서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적인 사용은 701년 다이호오(大寶) 율령 제정 후에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670년 보다 무려 300년 이전인 369년에 일본이라는 용어가 들어가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경영하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임나일본부의 위치, 기능, 역할 등에 대한 연구들을 종합하더라도 한반도 남부지역과의 관련성은 전혀 타당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지난 2016년 11월 서울서부지방법원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의미있는 판결이 있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덕일 소장은 그의 저서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김현구 前 고려대 교수가 그의 저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백제는 야마토(大和) 왜(倭)의 식민지였고, 일제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주장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현구 교수는 이덕일 소장이 허위사실 적시로 출판물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2014년 9월 고소했다. 1심 재판부는 이를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에 이덕일 소장은 “허위사실을 적시하지 않았고, 의견을 표명한 것”이라며 항소하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공소사실을 보두 부정하고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 판결은 임나일본부설의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고소의 소재가 임나일본부설이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갔다.

다음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폄훼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일본의 인사들을 몇몇 살펴본다.

우선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인 스에마스 카즈야스(末松保和, 1904.8~1992.4)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 날조한 식민사학자의 전형이다. 그는 1933년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 부임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 <일한관계>라는 연구서인 『대일본사(大日本史)』를 발표하였고, 한편으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것이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였다. 여기서 임나일본부설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임나일본부는 왜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해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 등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 「광개토왕비문」이나 『송서』 왜국전의 문헌기록에 대하여 과장되게 해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의 사실관계만 검토해 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 연구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나이[畿內]의 야마토 세력[大和勢力]이 주변의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가능했다고 하는데, 야마토(大和) 정권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부지역을 4세기부터 경영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또한,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 고분 발굴 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의 유물문화가 5, 6세기까지도 연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증거가 문화유물에 반영된 바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서의 문헌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라 하겠다.

스에마쓰에 의해 학문적으로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김석형(金錫亨, 1915~1996.11.26.)이 1966년 『초기 조일관계 연구』를 통해 일본고대사 자체에 대한 반론이 발표되자, 그 충격에 의해 1970년대 이후 일본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아쉬운 점은 임나일본부설이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논리임에도 우리 사학계에서 이렇다할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은 광개토대왕 비문과 관련하여 일본 육군 소속의 사카와 카게아키(酒匂景信) 중위이다. 그는 1850년 일본 큐슈의 미야자키에서 태어났고, 1879년 29살 무렵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그는 1880년 당시 청나라로 파견을 나가 4년간 근무를 하였다. 그 중 1883년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간 중국 동북지방을 다니면서 각종 정보를 모으게 되는데, 집안현에서 엄청난 규모의 광개토왕비를 보게 되었다. 높이 6.9m에 폭이 1.35~2m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의 비석을 보고는 비석 옆집에 사는 중국인에게 돈을 주고 탁본을 뜨게 한 후 1884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 뜬 탁본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글자 둘레에 선을 그린 다음 그 여백을 진한 먹으로 메워서 탁본처럼 보이게 만드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5년간의 비밀 연구 끝에 1889년 6월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횡정충직(橫井忠直)이라는 인사의 이름으로 광개토왕 비문의 해석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辛卯年)’ 관련 내용은 임나일본부설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칠지도(七支刀)와 관련하여 칸 마사토모(菅政友)를 들 수 있다. 칸 마사토모는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대궁사(大宮司)로 근무하던 중 칠지도에 붙어있던 녹을 닦아 내다가 칼의 양쪽 옆면에 금으로 상감된 명문(銘文)을 발견하였다. 명문은 한쪽에 34자, 다른 쪽에 27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칠지도의 제작 연대를 비롯하여 제작 주체와 목적에 대하여 논란이 일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은 나오지 않았지만 제작 당시의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해석한다면 백제가 제작하여 제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 자연스런 해석이다. 다만, 최초 발견자인 칸 마사토모가 있는 그대로의 칠지도 명문을 밝혀 주었다면 지금까지 별다른 논란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다음으로는 일본의 고고학자로 명성을 떨치다가 하루 아침에 추락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1950년 출생)이다. 그는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운 후 1972년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다.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座散亂木) 유적에서 당시로서는 일본 최고인 4만 수천년 전의 석기를 발굴하였고, 이후에도 그가 발굴하는 곳에서는 항상 유물이 나와 ‘석기의 神’, ‘신의 손’으로 불렸다. 기가 발굴한 유적을 통해 일본의 인류 역사가 7만~5만년 前에서 약 70만년 前으로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나 2000년 10월 그가 구석기 유적지에 미리 석기를 파묻는 모습이 몰래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유적 날조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일본 고고학회에서는 후지무라를 제명하였고, 그가 관여한 180여 곳의 유적들에 대한 진위여부를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그가 발굴한 총 180여곳의 유적 가운데 162개 전-중기 유적이 모두 날조된 것으로 밝혀 졌으며, 일본의 인류 역사는 7만~5만년 전으로 되돌아 갔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영유권의 논리를 세운 가와가미 겐죠(川上健三, 1905.9~1995.3)를 들 수 있다. 가와가미 겐죠는 명치 42년(1905년) 9월 15일 동경에서 태어났고, 1995년 8월 22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시마네현이 독도를 영토편입 조치했던 바로 그해 1905년에 태어났다.

28세가 되던 1933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고, 졸업 후 일시적으로 대만에서 교직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최종학력은 문학박사이지만 어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가와가미 겐죠가 한국과의 교섭 시기에 부지런히 연구하여 ‘竹島の 歷史地理學的硏究’라는 논문을 썼고, 이것이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것을 입증했으며, 이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소화 17년(1942년) 당시 도조 히데키 총리에 의해 전쟁수행을 위해 설치한 大東亞省에 들어갔고, 전후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이어 같은 해 9월초 연합국최고사령부가 동경에 설치되면서 강화조약 체결에 대비한 평화조약문제연구회가 운영되었는데, 가와가미 겐죠는 이 연구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1950~60년대 한일간의 독도문제 관련 왕복 외교문서의 전체적인 내용과 1966년 가와가미 겐죠가 출간한 『竹島の歷史地理學的硏究』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측 외교문서의 작성을 가와가미 겐죠가 주도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죽도의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독도에 대하여 1905년 시마네현 영토편입 조치를 취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우선 역사적 배경으로 고문헌 속의 독도를 설명하면서 한국측은 1905년까지 독도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과 1690년대의 안용복의 활동은 허구였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시마네현 편입의 국제법적 정당성과 편입조치 이후의 독도 경영을 통해 일본에 의한 국제법적 지위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마무리로는 독도에 대한 인지문제를 들어 다시 한번 한국측의 인지 불가를 거론하면서 울릉도와 독도지역의 기상조건까지 동원하여 육안으로 관측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로 한국측의 독도 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 문제 관련 일본인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사실관계 자체를 조작하거나 왜곡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식민통치가 끝이 난지 66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일본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왜곡이 진행중이다. 이를테면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독도가 ‘일본 고유영토’라는 왜곡된 사실을 2019년부터 초-중-고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 중에서 가장 뼛속 깊이 상처를 준 것은 역사 침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 침략에 대하여 우리의 대응은 어떠한가. 아직도 우리는 일본 식민시대에 드리워졌던 식민사관의 그림자를 온전히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2021년 광복절을 보내면서 이제부터라도 한일간의 역사문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온전하게 정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전남 함평 ‘신덕 1호분’ 전경(왼쪽)과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관(오른쪽)
전남 함평 ‘신덕 1호분’ 전경(왼쪽)과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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