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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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22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19.05.2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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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 칸의 리더십

징기스 칸의 본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이다.

성이 보르지긴이고, 이름이 테무진이다.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패아지근 철목진)이라고 적는다. 몽골어로 철인(鐵人)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테무진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투에서 쓰러뜨린 적 부족장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그의 성이 보르지긴인 것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몽골족의 한 갈래인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씨족장이었기 때문이다.

징기스 칸은 1162년 오늘날 시베리아와 인접한 몽골 동부지역 헨티 아이막에 흐르는 오논 강 유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호에룬은 올크누트족 출신으로 당초 메르키트족의 남자 칠레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친정 부족에서 남편 부족에게로 이동하던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 예수게이와 또 한 번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징기스 칸이 태어나던 날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 하였다고 몽골비사는 밝히고 있다.

이후 테무진이 9살 되던 해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예수게이를 믿고 따르던 부족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테무진 일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왔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독살로 평생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을 가졌다. 물론 아버지를 살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타타르족을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족에서는 되려 이를 악용해서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 하고 독살한 것이기에 테무진의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이후에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렸다.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9명이 돼버렸다. 게다가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을 풀기도 했다.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남시베리아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9명이 추적자를 피하고 늑대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라고 몽골비사는 전하고 있다.

테무진은 예수게이가 호에룬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혼인을 하여 벡테르와 벨구테이라는 이복 형제가 있었는데, 테무진의 사냥물을 빼앗아가는 일로 갈등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날 테무진이 났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가로채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진이 동생 카사르와 함께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얼마 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족의 공격을 받게 된다. 테무친은 테르구네 고지의 숲에 숨어 9일 동안 숨어 지냈지만 결국 타이치오드족에게 발각되어 잡히고,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친은 경계병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던 솔도스족인 소르칸 시라와 가족들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서 탈출에 성공해 흩어졌던 가족들과 재회한다.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 후에 가족들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오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한 어릴 적에 약혼한 보르테라는 여인과 재회하여 결혼하기도 하였다.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를 맺은 적이 있었던 케레이드 부족의 족장인 옹 칸을 찾아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양아버지인 옹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했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부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직 온전한 힘을 갖추지 못했던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도 불가능했다.테무진은 옹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무카 등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족를 쳐서 복수하여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인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 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했으며 테무진이 구하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았다. 다만 테무진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아내를 되찾은 후에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약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다. 당당한 가문 출신인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테무진이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다.

메르키트족에 대한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테무진이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에 잠시 동안 자무카의 자다란 족에 몸을 의탁했다. 자무카는 주변 부족을 정복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모두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의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했다. 이 시절 테무진에게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 없는 보르추와 노예 출신 젤메였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과 충성에 따라 대하였다. 이런 태도 때문에 테무진의 인기가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이를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고했다. 결별할 때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상당수 테무진을 따라갔다.

이후에 테무진은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 의해 몽골 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행상을 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말 도둑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구성하여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하고, 친족으로 이루어진 11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 후 기록에 10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옹 칸을 도와 타타르족을 공격할 것을 명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테무진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테무진은 금나라 승상 왕경의 요청을 받아 옹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타타르 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족의 장수인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이 일로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이란 직위를 하사받았고,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테무진은 35살이 되던 1197년 메르키트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옹 칸에게 보내며 옹 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하고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후 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 부족을 정벌, 당시 내전중이던 타이 부카, 부이룩 칸 형제를 동시에 공격한다.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친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라는 지역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과 대치하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은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을 속인 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하였다.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 지역으로 도주한다.

다음 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지역으로 철수한다. 테무진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한다. 여기에 이미 정벌했던 메르키트 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나라가 안팎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옹 칸은 얼마 전에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 요청을 하였고, 테무진도 이에 응한다. 옹 칸을 비롯하여 전 군사가 몰살당할 상황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이때부터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테무진이 38살이 되던 1200년 그는 옹 칸과 사리 케헤르지역에서 몽고지역 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를 개최한다. 라시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자신의 부족인 바아린 부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회의 직후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 부족을 공격한다. 테무진 연합군은 타이치우드 군대와 오난 초원에서 전투해 승리한다.

타이치우드의 전투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킨과 살지우트 종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 족을 모아 테무진,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서약하고 연합군을 만든다. 테무진은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이후 1201년 구르 칸으로 추대된 자무카가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연합군을 구성하여 공격해오자 함께 타타르를 정벌했던 케레이트의 옹 칸과 몽골-케레이트 연합군을 결성하여 쿠이텐에서 맞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 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전멸시키는 등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 이 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 후에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는데, 테무진은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다.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알탄과 쿠차르라는 귀족과 테무진의 숙부 다이타르가 이후 자무카에게 귀순하게 된다. 한편 테무진은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주치와 옹 칸의 딸, 자신의 딸과 옹 칸의 손자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 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옹 칸은 계략을 세웠다. 혼인을 수락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 했던 것이었다. 소수 병사만 이끌고 옹 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이같은 계략을 알아채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테무진 일행이 4일간 도망하여 다다른 곳이 발주나 호수였다고 한다. 말이 호수이지 그냥 웅덩이 정도인 흙탕물의 발주나에서 테무진관 함께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19명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오늘날 ‘발주나 맹약’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이 테무진 나이 40살이되던 1202년에 일어났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친동생이인 카사르와 이복동생인 벨테구이를 제외하면 종족, 종교, 사용 언어가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후 테무진은 발주나에서 자신의 세력을 회복하였고, 자신의 힘으로 통일전쟁을 펼쳐 나갔다. 중앙 몽골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꺾은 테무진 칸은 서부 몽골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나이만 족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크게 이겼으며,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 메르키트 족도 재차 공격하여 복수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자신의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이렇게 케레이트, 나이만, 자무카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이긴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한다.

어느덧 44세가 된 테무진은 1206년 부르칸 칼둔 성산(聖山)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몽고지역의 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었다. 이 회의를 통해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징기즈 칸이었다.

징기스 칸이 된 테무진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1207년부터 1209년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탕구트, 즉 서하(西夏)를 정복했다.

징기스 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징기스 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징기스 칸은 다음해인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하여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징기스 칸은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동서를 넘나드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잔인한 정복자'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징기스 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인종, 종교, 문화가 다르더라도 차별하지 않는다”것을 실천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징기스 칸이 세운 몽골 제국의 초기 수도였던 카라코룸은 이민자의 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카라코룸을 방문한 프랑스인 선교사 뤼브뤽은 『몽골제국 여행기』에서 개방성과 관용성, 역동성이 넘치는 카라코룸의 모습을 소개했다. ‘헝가리 여자, 그녀와 결혼한 러시아 건축가, 파리 출신 금세공인 등 유럽인들은 카라코룸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기독교 목사와 이슬람 성직자, 불교 스님, 심지어 정령 숭배자와 주술사 등이 자유롭게 종교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평화롭게 공존했으며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라고 했다.

결국 징기스 칸은 대제국을 다스리는데 있어 사람을 선택할 때에는 굴곡진 그의 인생역정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직계 존비속이나 친인척을 넘어 올바른 가치관과 충성심을 중요시했다. 특별히 발주나 호수에서 끝까지 그를 따랐던 19명의 전사들과 맹세했던 마음을 잊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 정부의 인사정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중 일부 언론에서는

현 정부의 인사는 ‘날림 공사’라고 비판하고 있다.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사에게 장관으로서 전권(全權)을 주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게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처럼 인사를 하면서 오로지 ‘정치 공학(工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한다. 분위기 반전용 인사, 혹은 선거를 위한 인사, 이너서클 속에서 자리 안배를 위한 회전문 인사를 할 뿐이기에 결과적으로 날림·졸속 인사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이와 관련하여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이라는 인사가 떠오른다.

김 전 실장은 산업화 정권과 민주화 정권에 모두 몸담아 일한 사람이다. 경북 울진이 배출한 판사 출신으로 민정당 3선 의원, 노태우 정권 때는 정무수석을 지냈다. 그런 김 중권을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영남 출신인 그를 비서실장으로 선택했다. 동서 화합의 상징이었다. 일부에선 그런 선택에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김중권 비서실장은 21개월 동안 청와대 비서실장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인류 역사에 있어 13세기에 세계가 놀랄만한 군사적 업적을 통해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징기스 칸의 리더십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의 정치에서도 국민 모두가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는 인사정책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몽골 울란바토르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징기스칸 기마상 (출처 : 네이버)
몽골 울란바토르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징기스칸 기마상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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