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17:16 (목)
[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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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11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19.03.04 10: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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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민시대를 되돌아 보자

필자가 초등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시기를 ‘36년간’이라고 배웠다. 당시의 어린 학생으로서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제 식민통치는 36년간 이루어졌던 것으로 머리 속에 인식되었다.
그러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기간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을 때에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한 날이 1910년 8월 29일이고, 그 통치로부터 해방된 것이 1945년 8월 15일이니까 실질적인 식민통치 기간은 정확하게 34년 11개월 16일간이 된다. 그럼에도 필자는 우리나라가 36년간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올해는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날을 기준으로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여 일본 식민시대를 되돌아 보고, 다시 맞이할 시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일 합병 이전>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이끄는 해군 함대 4척의 출현으로부터 개항 요구를 받았고, 이듬해인 1854년 미일화친(가나가와)조약을 체결한 후 2개의 항구를 개항하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이웃 국가인 조선에 대하여 정벌론을 바탕으로 개항을 요구하였다. 1875년 조선이 거부한다면 전쟁을 해서라도 개항을 시키겠다고 ‘윤요호’라는 군함을 파견하였고, 조선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본이 군대를 앞세워 힘으로 강요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 중에는 조선은 일본 상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없고, 일본은 조선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으며, 조선에서 일어난 일본인 범죄는 일본에 재판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미 서양문물을 수용한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무리하게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군인들을 차별하여 13개월분의 급여를 주지 못한 것이 발단이 된 임오군란이 1882년에 구식군인에 의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요청하였고, 수습에 나선 대원군은 그간 급격하게 추진해온 개화 정책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청과 일본이 서울에 각자의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직 유교적 질서와 정신을 지키고 있던 조선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하여 근대화를 급격하게 수용하려는 급진개화파와 청나라의 양무운동처럼 동양의 도를 지키는 범위 안에서 근대화를 이루려는 온건개화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청나라와 일본의 빠른 변화를 경험한 급진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1884년 10월 17일 일본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 청으로부터 완전 독립, △ 군주권을 제한하여 일본과 비슷한 내각 중심의 권력구조 형성, △ 문벌을 뛰어 넘는 고른 인재 등용, △ 조세 및 재정제도 혁신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갑신정변은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갑신정변을 지원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던 일본은 피해자로 둔갑하여 조선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피해보상금과 공사관 부지와 공사대금을 요구하였다. 게다가 일본과 청나라는 이듬해인 1885년에 텐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모두 군사를 철수시키는 조항과 함께 후일 양국중 어느 한쪽이라도 조선에 군사를 파병하게 된다면 다른 한쪽도 동일하게 군사를 파견하도록 하여 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의 불씨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갑신정변이 있었던 1884년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까지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1894년 2월 10일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으로부터 같은 해 7월 27일 단행한 갑오개혁에 이은 1895년 10월 8일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기 위한 수순을 하나씩 밟아 나갔다.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가쯔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에 의한 필리핀의 식민 지배를 일본이 묵인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기로 합의를 하였고, 이에 따라 미국은 조선에서 물러났다.
1905년 들어 제2차 영일동맹을 토대로 영국도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용인하게 되었고, 같은해 포츠머스 조약을 근거로 전재에서 패한 러시아도 일존의 조선 식민 지배를 용인하게 됨에 따라 사실상 일본의 조선 지배를 방해할 열강세력은 남지 않게 되었다.
일본을 이를 기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무장 호위병을 이끌고 1905년 고종의 궁에 들어가 을사보호조약에 강제로 날인하게 하였다.
이 보호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대신 지켜준다는 내용이 골자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기위한 사전준비였으며, 그 후 고종은 일제의 감시속에서 허수아비 왕노릇을 하다가 최후의 희망으로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일본은 정미 7조약을 통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조선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박탈하였는데, 조선 병합을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 진행켜가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게 되었다.
이미 모든 것을 상실한 조선에 대해 이토의 후임으로 들어선 자치통감 테라우찌 마사타케는 당시 일본의 지원속에 조선의 실권을 휘두르던 이왕용과 함께 1910년 5월 한일합방의 조약을 명확히 정하였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한입합방조약에 서명하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순종을 퇴위시키면서 한일합방을 발표하여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치밀하고 집요하게 조선의 손과 발을 묶으며 주변국들의 영향력마저 교묘하게 물리쳤다. 그리고는 한일합방 조약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다.

<식민통치 시기>
일본의 식민 통치의 변화는 통상적으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이루어졌던 무단통치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1919년부터 1931년까지이며, 세반째 시기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첫 번째 시기인 무단통치 시기에 일제는 계몽 운동을 비롯한 민족적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하였으며, 일반 경찰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지닌 헌병제도를 통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헌병은 즉결처분의 권한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인 검거, 소송 절차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 백성들을 폭행,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아이러니한 것은 식민지 시기 헌병의 절반가량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본인보다 더 악랄한 방식으로 같은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때 축적한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이후에도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곤 하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인에 의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도 박탈당했다.무단통치 시기에 일제가 주력한 경제 정책은 토지의 수탈이었다. 이 시기는 식민지 경제 체제의 구축을 시도하던 시기로 토지 조사 사업의 실시와 함께 광업령, 어업령, 회사령을 내려 조선 내에 있던 대부분의 생산 기반을 몰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몰락하게 만들거나 거리로 내몰게 만든 주범이라 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명목상으로는 중앙 정부의 측정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토지까지 모두 통계를 내어 관리를 쉽게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당시 일본에서 이주해 오고 있던 일본인 지주와 총독부 산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송두리째 가로채 가도록 한 사업이다.
두 번째 시기는 문화통치의 시기인데, 1919년 일어난 3·1 운동이 분수령이 되었다.
무단통치 기간 동안 쌓여왔던 수많은 농민과 반일 지식인들의 분노는 3·1 운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분출되었다. 3·1 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곧바로 해방을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식민지 조선에 대한 외국의 인식을 바꾸고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의 반식민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종래 지식인, 계몽사상가들만의 활동이었던 민족 독립운동을 국내외의 거족적인 항쟁으로 그 격을 높이어,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이처럼 전국적으로 터져 나왔던 항일독립운동의 영향력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그간 유지해 왔던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고도의 유화정책인 문화정치로 통치 노선을 변경하게 된다.이 시기에는 헌병이 경찰 업무를 대행하던 무단통치시기와는 달리 보통 경찰제가 실시된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모두 박탈했던 이전 통치와는 달리 민족 신문 발행이 허가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신문과 잡지, 동인지가 출간된다. 이밖에도 학교에서 칼을 차고 수업에 들어오던 교원들에게 칼을 차지 못하게 하고 조선인의 총독부 관직을 허용하는 등 일정부분 우리 민족의 숨통을 열어주는 듯 보이는 정책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정책은 3·1 운동을 통해 나타났던 전국적 항일운동의 흐름을 차단하고 우리 민족 구성원 간의 의식격차를 발생시켜 사회적 통합을 막고자 한 의도가 다분하다.문화통치 시기 동안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실행하였다. 이는 일본 내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쌀을 빼앗아 보충한 정책으로서, 겉으로는 우리 나라의 쌀 생산량을 증가시켜준다는 명목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빼앗아 가겠다는 의도일 뿐이었다. 무단통치시기 동안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대부분 일제와 일본인 지주에게 빼앗겼던 우리 농민들은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더더욱 처참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31년부터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의 시기로 병참기지화 및 민족정체성의 말살 정책기라 할 수 있다.
일제는 1931년 일본 관동군을 만주로 보내 만주 전역을 점거하는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는 일본의 침략 야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이때부터 일제는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이란 명목 하에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다. 만주사변은 이를 위한 병참기지화 건설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던 것이다.이후 일제는 1937년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에는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에 예고도 없는 무차별 폭격을 가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범위가 넓어지고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이에 일제는 한반도와 만주를 전쟁물자 공급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 공산품과 식량 대부분을 전쟁터로 보낸다. 이에 따라 조선의 물자는 부족해지고 특히나 일본인 지주들로부터 온갖 수탈을 당했던 대다수 농민들은 더더욱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일제는 이와 같이 물자 공급을 위한 기지로서만 우리 나라를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일하거나 싸울 학도병과, 일본인 병사들의 노리갯감으로 쓸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징용해 가기에 이른다.일제는 처음에는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 전망했지만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일본군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태평양전쟁에서도 미국의 압도적인 전력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에 불안요소가 늘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일제는 혹시 또 다시 일어날지 모를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해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일제는 우리말 사용과 국사교육을 전면 금지해 무조건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사 참배를 요구하고 창씨개명을 강제하여 우리의 민족혼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하였다. 황국신민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이와 같은 탄압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친일 세력을 더욱 많이 만들어내었다.

<현재 상황에서>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는 최종적으로 우리 민족 말살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통치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걷어내지 못하고 연합국에 의한 2차 세계대전 종결의 한 부분으로 광복이 이루어졌다. 안타깝게도 연합국에 의한 식민통치 청산이다 보니 ‘독도문제’와 같은 부분에서 아직도 일본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구나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는 식민시대의 잔재들은 무수히 널려 있는데 진정어린 반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일본의 태도에 울분이 넘친다.
같은 2차대전 추축국이었던 독일이 보여주는 과거사 반성에 대한 태도와 오늘의 시점에서 일본의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도 당황스럽다.
또한 우리의 문화재나 유물이 일본 내에서 간헐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이웃으로서 아픈 과거를 씻고 미래를 함께 하지면 일본 내에 묻혀있는 우리의 각종 유물들부터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과거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기대하며 (자료 출처 : 네이버)
과거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기대하며 (자료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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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순 2019-03-04 11:09:17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박사님 오늘도 좋은 내용 감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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