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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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5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19.01.2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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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해전과 한산도 대첩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첨단 과학무기가 갖추어진 현시대에 있어 전쟁은 곧 공멸이라는 의식을 공감하고 있기에 실질적인 전쟁 위험은 상당히 감소하였지만, 근대 이전의 시대에 있어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인류의 전쟁 중에서도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더 힘겨웠을 것이다.
바다는 사람의 이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무기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육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바다 위의 전쟁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며 세계 해군전쟁사를 살펴보았다.
인류 역사의 해전에 있어 가장 위대한 전쟁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이나 책자를 살펴보면서 의아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자료가 세계 3대 해전을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그리고 ‘트라팔가 해전’이라고 선정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더하여 3대 해전 평가에 대해 아쉬운 점은 선정한 기준이나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기준으로 무엇을 근거로 세계 3대 해전을 선정했는지에 대하여는 어느 곳에서도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록으로 남아 있는 3대 해전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비교해 보았다.
필자가 만든 <세계 주요 해전 비교>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BC) 480년 9월 일어났다.
당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했을 때,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7일 동안 페르시아 군을 막아내며 그리스 해군의 퇴각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후 테미스토클레스의 아테네 함대가 살라미스 섬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해 전술적 · 기술적 이점을 활용하며 대승을 거둔 전쟁이다.
육전에서의 잇따른 패배소식을 들으며 그리스 함대는 해안을 따라 아테네와 살라미스 섬을 향해 멀리 우회하면서 테미스토클레스는 본격적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여 해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전투 장소를 살라미스(Salamis) 섬과 아티카 사이의 해협으로 결정했는데, 그곳 해협은 폭이 2~3km로 좁아서 페르시아의 밀집함대를 끌여 들여 싸운다면, 우수한 해군을 거느린 그리스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문제의 해협이 페르시아 함대로 꽉 메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일순간에 공격명령을 내림으로써 격전이 벌어졌다. 그리스 3단 노함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적선 좌우 측면을 들이받고 하는 등의 기술적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약 7시간의 격전을 치른 결과 페르시아는 200척의 함선을 격침당하고, 또 그만한 숫자를 그리스군에 포획당했다. 이에 비해 그리스 함대는 불과 40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해전에서 대패를 당해 보급마저 끊길 위험에 처하게 되자 서둘러 회군하고 말았으며, 그리스 해군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여름 소아시아 지역으로 출동하여 페르시아의 나머지 함대를 모조리 쳐부수었다.
살라미스 해전 후 그리스는 두 번 다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지 않았으며, 이로써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아테네는 오랫동안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1588년 8월 일어난 ‘칼레 해전’을 살펴보자.
해양패권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부를 축적하던 스페인과 새로이 해양패권 자리에 도전하려는 영국은 1585년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신대륙 발견으로 신대륙의 은광을 통해 막대한 양의 은을 들여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여기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얻게 된 ‘아르마다’ 함대의 존재가 가장 컸다. 이 강력한 함대를 통해 신대륙을 개척하고 통상로를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상 이를 ‘무적함대’라 불렀다. 또한 라이벌이던 포르투갈을 병합함으로써 유럽에는 더 이상 스페인을 상대할 나라가 없게 됐다.  
영국은 스페인의 부흥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아르마다 함대 때문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략함대를 운용해서 스페인 상선을 공격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략해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아르마다를 격파하게 했다.
먼저 드레이크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서 스페인의 군항인 카디스항을 선제공격했다. 스페인은 아직 전쟁준비가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함대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고, 마침내 스페인은 1588년 5월 아르마다를 출동시킨다. 스페인함대는 130척에 달했고 그중에 65척이 갈레온(Galleon, 16세기부터 18세기 무렵까지 사용된 범선으로 서구 여러 나라에서 갈리온을 건조하여 군함과 상선으로 사용하였음)이었다. 영국은 모두 197척의 전함을 출동시켰는데, 그 가운데 갈레온은 25척, 그밖에 40척의 전투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배의 크기는 스페인의 것들이 더 컸지만 스페인 배는 속도가 느린 단점이 있었고 지휘관들은 해전에 무지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드레이크가 지휘하고 있었고 승무원들도 해적질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가 영국 근해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두 나라 함대는 닷새 동안 포격전을 계속했다. 영국 함대는 소규모로 함대를 조직해서 장거리포를 이용해 치고 빠지는 방법을 계속 고수했다. 스페인 함대의 포탄이 고갈되자 영국 함대는 대공세에 나서 11척을 침몰시켰다. 결국 스페인 함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을 하게 되는데, 전력이 약화된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를 우회해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스페인에 도착할 때까지 함대는 2번의 태풍을 더 맞게 된다. 스페인 해군은 이 전투로 81척의 함대를 잃었으나 그중 전투 중에 침몰한 배는 단 3척에 불과했다.
칼레 해전의 결과로 스페인은 최강국의 지위를 상실하고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영국은 해양국가로 급성장하게 되면서 ‘지지않는 태양의 나라’로 발돋움하게 된다.

세 번째로 1805년 10월 일어난 ‘트라팔가 해전’을 살펴 본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1805년 10월 21일 영국 해군과 프랑스 및 스페인 연합합대가 벌인 전투로, 나폴레옹 전쟁의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일부이다.
빅토리호에 탑승한 허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27척의 영국 전열함은 피에르 빌뇌브가 이끄는 33척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멸했다. 전투는 트라팔가르곶(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브롤터 해협의 북서쪽에 있는 스페인 Cádiz 주의 갑(岬) 지역) 바로 서쪽인 스페인 남서해안의 대서양에서 맞붙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22척의 전함을 잃었고, 영국 함대는 1척도 잃지 않았다. 이 승리를 통해 영국의 제해권이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이는 넬슨 제독의 해상 전략이 유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통적인 해전 방식은 전 함대가 평행선을 이룬 상태에서 교전하는 것이었지만, 넬슨은 2줄로 함대를 배치한 후 적 함대를 향해 가파르게 돌진했다.
전투 동안 넬슨은 프랑스 소총수에 저격되었고, 전투가 끝나기 직전 사망했다. 프랑스 빌뇌브 제독은 함선 부센트레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
 트라팔가 전쟁의 결과 나폴레옹의 영국 진출은 좌절되었고, 19세게 내내 영국은 대서양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살펴보자.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장악한 뒤 순식간에 수도인 한양까지 진격했다.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불과 20여 일 만에 수도인 한양까지 점령당한 조선은 제14대 임금인 선조가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며 한반도를 점령해 가자 조선은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이때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일본은 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거듭 패하자 병력과 함선을 한데 모아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에 이순신은 많은 수의 적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56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 73척의 전선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한산도 앞바다가 싸움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본 수군을 그곳으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일본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나타나자, 조선 수군은 함선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펼친 뒤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돌격선인 거북선은 혼란에 빠진 일본 수군의 진영을 휘저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거센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47척의 배가 바다에 침몰되고 12척을 빼앗긴 채 14척의 배만 가지고 물러나고 말았다. 조선측에서는 단 한 척의 전선 손실없이 13명 정도의 사상자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적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전쟁은 승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고, 전혀 패배를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패는 장수의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계 3대 해전과 한산도 대첩은 살라미스의 ‘테미스토클레스’, 칼레의 ‘드레이크’, 트라팔가의 ‘넬슨’, 그리고 한산도의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전쟁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지역인 살라미스, 트라팔가, 한산도는 좁은 해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결과로 발생된 피해 규모나 내용면에서 한산도 대첩이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은 <비교표>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세계 3대 해전에 한산도 대첩은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고대시기 지중해를 장악했던 그리스, 대서양에서 가장 먼저 최강국의 지위에 올랐던 스페인, 그리고 스페인에 뒤를 이어 해양 제국을 구가했던 영국 등이 세계 3대 해전의 명예를 누리고 있지만, 임진왜란이란 불의의 침략 속에 풍전등화의 위기상황 속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 세계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토해 보는 2019년 1월이다.
독자 여러분의 건승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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