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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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세상사는 이야기-2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19.01.0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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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의 두만강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우리나라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고 김정구 선생의 ‘눈물젓은 두만강’의 첫 구절이다.
몇 년전 연변지역을 방문하면서 중국지역에서 살펴본 두만강은 노젓는 배를 띄울 수 없을 만큼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았다.
그런 두만강을 보면서 강건너 북녘땅의 동포들이 걱정없이 잘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장엄한 두만강물을 기대했던 마음이 쑥럽기만 했었다.
이같은 기억을 지난 가을에 읽었던 『역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라는 제하의 책이 깔끔하게 씻어 주었다.
현재 연변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김관웅 저자는 두만강에 대한 시각을 참으로 깊이 있고 예리하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평소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하고, 하고 싶은 일들만 하려고 해서, 자신과 관련 없는 부분에 너무 소홀하고 심지어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저 자신에게 많은 자성을 불러왔다.
두만강!
우리가 흔히 민족의 성산이라 부르는 백두산을 안고 있고, 한반도 지역의 머리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강이다. 그 강을 중심으로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되었는지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예로부터 중국 중원의 한족들이 주변국들을 이를 때 동이(東夷), 서강(西羌),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였다. 여기서 서쪽은 ‘양’과 관련지었고, 남쪽은 벌레나 뱀과 같은 짐승에 비유했으며, 북쪽은 개나 승냥이 같은 짐승에 비유했지만, 동쪽에 대해서 만큼은 커단란 활(大+弓)로 표현하였다. 이는 동쪽의 사람들이 깊은 밀림과 넓은 들판에서 긴 창과 큰 활을 가지고 생활해 왔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동이족의 중심지역이 두만강이었음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생활해온 동이족이 가장 먼저 빛을 발한 역사를 ‘발해(渤海)가 보여주었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으로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제13대 대현석(大玄錫, 872~893년) 왕 시기에 이르러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발해가 두었던 5경중 중경과 동경 등 2경은 연변의 두만강 유역에 있었고, 이들 지역이 발해 시기에 있어 가장 핵심지역으로 기능했다.
그리고 이토록 융성했던 발해가 갑작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데에는 몇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거란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설이다. 당시 중세문화의 최고를 자랑하던 발해가 문치주의 지나치게 편중된 나머지 상무정신을 잃어버려 몽골초원에서 말달리고 활쏘며 전투력을 키운 거란족들에게 맥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분에 의한 멸망설이다. 문헌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문명의 발생, 성장, 발전, 쇄락의 법칙을 감안해본다면 내분으로 국력이 약해졌을 무렵에 외부세력으로부터의 갑작스런 충격에 쉽게 무너졌을 것이란 추정이다. 셋째는 자연재해에 의한 멸망설이다. 이는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2002년에 백두산에서 채집한 용암과 화산재로 말라죽은 고목들의 연대를 측정하여 백두산 정상에서 화산이 폭발한 시기를 925년에서 945년 사이로 추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만약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발해가 거란으로부터 침입을 받기 한 해 전에 화산이 폭발한 것이 된다. 그러나 2017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백두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영국·중국·한국 등 화산 전문가들이 화산지에서 채집한 나무 나이테 측정해 확인한 결과, 문제의 백두산 화산 폭발은 946년 가을로 추정하면서 926년 발해 멸망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밝혔다.
이러한 발표는 우리 역사서인 고려사에 946년 개성 하늘에서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렸다는 기록과 일본 나라 지역의 한 사찰에서 946년 11월 3일에 '하얀 재가 눈처럼 떨어졌다'는 기록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어 발해의 자연재해 멸망설은 근거가 약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중국 金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금사(金史)』의 첫 부분에는 금나라의 시조 함보(函普)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10세기 초 지금의 한반도에서 살았던 함보라는 사람이 고려에서 왔으며, 북쪽으로 이동하여 백두산 아래 두만강 유역에 있는 완안부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10세기 초는 우리의 역사에서 후삼국의 어지러운 시기였고, 특히 926년에는 발해가 멸망한 시기이기도 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이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두만강 유역이 주인없는 땅으로 변한 상황이라 ‘함보’와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보의 출신과 관련하여 『金史』에서는 고려에서 왔다고 하고,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과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는 신라에서 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살핀 대로 함보가 고려 혹은 신라를 떠나 두만강 지역의 완안부로 들어간 921년 전후 시기는 신라가 멸망을 길을 걷고 후삼국이 할거하던 상황으로 짐작된다.
다만, 함보의 직계 후손인 누르하치가 ‘金’이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운 것은 김씨가 왕으로 있었던 신라와 관련지어 볼 때 함보의 출신이 ‘신라’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하여 금나라에 의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결말로 조선 선조의 삼전도 비극을 겪으면서도 조선이라는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던 부분도 ‘金’나라와 ‘신라’의 연결고리가 작용한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또 한 인물인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살펴보자.
‘용비어천가’의 첫 3장 부분에는 “옛날 주(周)나라 대왕이 빈곡(豳谷)에 사시어서 제업(帝業)을 여시니. 우리 시조(始祖)가 경흥(慶興)에 사시어서 왕업(王業)을 여시니”라고 하여, 조선시대를 경흥에서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경흥이 바로 현재 북한 양강도 혜산시 지역을 말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전주 출신인 이성계 집안의 전주에서의 기록의 거의 없지만,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와 증조부 익조의 구체적인 행적이 두만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성계와 가장 가까웠던 이지란 장군은 여진족 출신으로 공민왕 20년(1371년)에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李 씨 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은 것으로 보아 이성계 역시 두만강 지역에서 성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야흐로 평화와 번영을 화두로 남북한의 관계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두만강이 우리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었지만, 간략하게 살펴본 위와 같은 우리의 역사는 두만강과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두만강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두만강 지도
두만강 지도
두만강 모습 (출처 : 네이버 이미지)
두만강 모습 (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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