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넘어 미래를 향한 한일관계를 기대한다

금년 2월부터 독도문제를 중심으로 칼럼을 써왔다.

어느덧 12월도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2018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2019년 새해가 되면 일본의 초중고교에서는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으로 독도 관련 교육이 전면적으로 실시될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가장 껄끄럽고 불편한 상대로 그야말로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이러한 한일간의 미묘한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필자는 수 천년을 이웃으로 살아오면서 빚어진 올바르지 못하고 왜곡된 역사 의식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한일간의 과거사를 되돌아 보고, 건설적인 미래를 향한 한일관계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한일 선사시대를 살펴본다.

이미 지난 칼럼에서 밝혔지만 동아시아의 한국, 중국, 일본 등 3개국의 역사에서 인류역사 시기가 가장 늦었다고 보는 일본은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고고학자가 일본의 선사시대 시기를 높이려다 큰 봉변을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토기들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것들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오래 전부터 폭넓은 교류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벼농사, 동검이나 동탁 등 청동기 유물, 철기를 수반하는 야요이(彌生)문화는 주로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음으로 고대시대의 한일관계를 살펴본다.

일본의 고대시대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헤이조코(平城京)가 수도였던 나라(奈良)시대(710~794년)와 교토(京都)를 수도로 하였던 헤이안(平安)시대(794~1185년)를 일컫는다. 고대 시기에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도래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왜(倭) 세력들이 세운 야마토(大和)정권이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여 4세기 후반 백제와 국교를 맺었고, 7세기 즈음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일관계에 있어 고대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료는 ‘광개토대왕비문’과 ‘칠지도’이다. 이들 두 사료에 대한 해석에 있어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크게 갈라진다.

광개토대왕비의 경우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그의 부친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일본은 비의 내용중 ‘신묘년 기사’를 인용하여 4~5세기에 한반도를 지배하였었다는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임진왜란과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 식민지배에까지 정당성의 근거로 원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본측 주장에 대한 비판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오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가미 신궁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철검인데, 이 철검에 새겨진 명문을 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검에 새겨진 명문을 두고 ‘백제왕이 신하인 왜왕에게 전한 것이다’ 혹은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이다’는 해석을 둘러싸고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이해가 갈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이들 두 가지의 사료는 고대시대의 한일관계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어 있지만, 일본에 의해 먼저 발견된데 이어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서 파생된 문제점은 고대시대의 한일관계를 거시적으로 이해하는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중세시대의 한일관계를 살펴보자.

대체적으로 이 시기의 일본은 미나토토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지방에 수립한 최초의 무사정권(武士政權)인 카마쿠라막부(謙倉幕府, 1185~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정권을 잡았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1336~1573년),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에 개설한 에도막부(江戶幕府, 1603~1868년)까지의 무사정권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우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데, 고려시대 몽고족에 의한 원나라의 지배 및 간섭이 1271년부터 1356년까지 있었다.

고려는 920년과 101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나,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비록 국교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상인들에 의한 무역은 한일 사이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고려는 원치 않는 일본 원정을 1274년과 1281년 여몽연합군 형태로 참여하게 되었고, 원정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몽고의 압력에 의한 일본 원정이 있은 후 고려와 일본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단절 상태가 되었고, 당시 고려와의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일본 구주(九州)·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일본 혼슈(本州) 서부와 규슈(九州)·시코쿠(四國)에 에워싸인 다도해 지역) 연안의 영주들과 농민, 어민들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해적행위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고려시대 후반부에 급격히 늘어난 왜구(倭寇)들이고, 고려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1370~1380년 왜구의 활동이 정점에 달했다.

고려 및 조선 조정은 왜구에 대한 정벌과 함께 일본 무로마치막부와 서일본 영주들에게 왜구를 단속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태종 4년(1404년) 조선과 일본 무로마치막부 사이에 국교가 성립되어 양국의 선린외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일간의 선린관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완전히 단절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총 30만명의 일본군이 한반도를 침입하였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학자와 도공, 수많은 백성을 강제로 연행해 갔고, 대량의 서적과 문화재 등을 약탈해 갔다. 전쟁에서 조선의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에 의해 일본군은 패퇴하였고, 결국은 히데요시 정권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어 그의 정권은 급속하게 붕괴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뒤를 이은 에도막부(江戶幕府)는 1607년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였고, 1609년에는 통상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1624년까지 3차례의 회답사겸쇄환사(回答使兼刷還使)가 파견되었고, 1636~1811년 간 9회에 걸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다음 시기로 근대시대의 한일관계를 살펴본다.

중세시기가 끝나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한일관계는 1876년의 강화도조약(일명 朝日修好條規)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선박들이 조선에 내항해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부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가운데 1866년 한 해 동안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프랑스함대 격퇴 사건인 병인양요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한 개국과 더불어 1868년 단행한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같은 경험을 토대로 조선의 개국을 강요하였다.

강화도조약은 완전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이 서구열강으로부터 요구받았던 것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한 것이었다. 개항 후 일본 상인들에 의한 무역에서 조선의 물가는 폭등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리고 일본과의 개항은 여타 서구 열강들과의 조약체결로 이어져 조선은 열강들의 세력다툼의 무대가 되었다.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을 거쳐 1894년 동학민란을 겪으며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이 청일전쟁의 빌미가 되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영향력이 커진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영일동맹을 맺은 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조선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일본군의 행동의 자유와 기지 사용의 권리를 수중에 넣은 뒤, 제1차 한일협약에 의거해 외교와 재무에 고문을 앉히고 조선을 제압했다.

그 뒤 포츠머드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게 되자,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해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외교권을 박탈한 후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어서 1907년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법·경찰·통신 등의 권리를 박탈한 뒤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였다.

35년간의 식민통치 기간의 막바지에 일본은 한국인의 동화정책을 추진해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1937년 ’황국신민의 선서‘를 제정했고, 1939년네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실시했으며, 신사참배, 일본의 궁성 참례, 일장기 게양,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했다.

근대시기의 한일관계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이제 현시대의 한일관계를 살펴보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을 기점으로 한일관계는 식민지배에 대한 청산이 우선순위였다. 그러나 2차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에 대한 책임을 연합국에서 정리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남긴 채로 1951년 9월 8일 체결되었다. 독도문제 역시 이 조약 속에 묻혀버렸고, 일본은 이 조약을 근거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았다고 강변하고 있다.

한일관계는 해방 이후 20년이 지난 1965년 6월 22일에서야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는 관계없이 어려운 경제난을 극복하려는 위정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다행히 한일수교를 기점으로 우리가 경제개발에 성공함으로써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누그러졌다.

한일관계는 국교정상화 이후 54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특히 지난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국내 언론에서 일본 ‘천황’을 ‘일왕’으로 보도한 것을 계기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가 2015년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어느 정도 풀렸고, 그 해 연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타결되면서 잠시 개선의 여지를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70%가 넘는 위안부 합의 반대 여론에 직면한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2016년 말 부산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 문제가 불거졌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한일관계에 과거사 문제와 일반 한일관계를 분리하는 투트랙 정책을 선언했는데, 그 자체로는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된다.

다만 위안부 합의 문제에 대해 폐기도 아니고 이행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한일관계는 정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최근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면서 일본은 강하게 반발하고 우리는 대비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일관계 현주소라 하겠다.

이와 같은 한일관계의 흐름 속에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오랜 세월 가까운 이웃으로 함께 공존해온 역사 속에서 일본은 왜구 활동,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그리고 35년간의 식민지배 등 한국에게 다양한 형태의 침략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그 침략의 명분을 고대사 속의 검증되지 않은 사료 속에서 찾았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놀라운 기술을 기반으로 지구촌이 가족화되어가는 정보화시대를 맞이한 현시대에 한일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를 잃어버린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고 했던 조지 산타야나의 말처럼 일본은 과거사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올바르게 청산해야 한다. 2차 대전의 추축국이었던 독일이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사죄를 통해 세계사의 중심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실을 일본은 교훈 삼아야 한다.

아직도 한일 양국 사이에는 35년간의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가 온전하게 치료되지 못한 채 지워지지 않은 아픔으로 현재 진행형임을 일본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2019년부터 일본의 초중고교에서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라는 내용의 교육이 전면적으로 실시된다는 것은 한일관계에 있어 과거를 아예 눈감아버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2차 대전의 패배를 딛고 세계 중심국가로 성장한 일본!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세계 중심국가로의 도약에 채찍을 가하고 있는 대한민국!

새해 2019년에는 이들 두 나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인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2019년 새로운 한일관계의 전환점이 마련되길 기대하며-
2019년 새로운 한일관계의 전환점이 마련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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