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다리미술관 손일광 관장

[한국미디어뉴스통신=박주환 기자] 손일광 관장은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이자 전위예술가로 김구림 화백, 국내 최고의 판토마임 전수자 방태수 교수, 행위예술가 정찬승 선생, 그리고 얼마 전에 별세한 정강자 화백 등과 전위예술을 구현했던 초창기 멤버다. 한국 설치미술을 이끌어온 원류이자 ‘제4집단’의 핵심멤버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전위예술에서 행위예술로, 또 설치예술로 장르를 옮겨가며 새로운 새 장르를 창조해 온 손일광 관장은 한국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손일광 관장

서슬퍼런 군사정권 하에 ‘패션’이라는 장르조차 생소했던 그 시절 의상디자이너로 활약했던 손 관장은 1970년도 한국 최초의 가두패션쇼를 전위예술로 연출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마치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던 ‘패션쇼’. 화려한 장소를 빌어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각종 패션쇼에 반기를 들고 거리에서 시도한 것은 큰 이슈였다.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거리 패션쇼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전위화가인 김구림씨의 연출이 엮어져 거리를 수많은 인파로 들끓게 했다. 특히 ‘제4집단’은 손 관장과 김구림 화백, 방태수 교수, 정찬승 선생, 정강자 화백 등이 ‘가두 마임극’,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등 사회 부조리를 꼬집는 퍼포먼스로 연일 이슈였다. 반사회적 행위로 치부, 제재와 감시로 ‘제4집단’은 막을 내렸지만 현대미술사에선 ‘제4집단이말로 국내 전위예술의 원류’로 회자되고 있다.

손일광 관장은 “그 시대에도 내게 제일 절실했던 것은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며 “패션은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예술분야이므로 정형화된 스펙트럼 안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오기 힘들다. 늘 새로운 이벤트를 준비하되 정리해서 논리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소회했다. 패션을 대중과 호흡하게 하고 거리로 끌어낸 당시의 파격이 지금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도 ‘새로운 장르’로 이벤트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이후로 디자이너 손일광 관장은 디자이너로서 예술가로서, 때로는 ‘괴짜’로 불리며 각종 신문과 잡지 등 언론에 이름을 올리며 유명세를 치렀다.

지난 2016년 개관한 노랑다리미술관은 손 관장이 10여년간 세월동안 한땀 한땀 쌓아올린 상상력 넘치는 풍성한 미술관으로 건물자체가 설치미술로서 지어졌으며 내부에 100여점이 넘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아울러 야외 소공원과 카페도 함께 개방하고 있다. 대지 3000평, 건평 150평의 이곳은 탁 트인 자연풍광과 어우러진 운치있고 아늑한 산자락에 위치해 힐링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다.

“예술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천이다.”라고 주창하며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온 손일광 관장은 많은 스토리와 영감을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후배들에게 베풀기 위해 노랑다리미술관을 열었다. 아직도 20대의 열정과 영혼, 창작의지를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다. 손 관장은 지금도 하고 작품을 마음껏 해보지 못했다며 노랑다리박물관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싶다고 한다.

노랑다리미술관의 작품들은 그만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 채워져 있다. 벌레먹은 파란 사과, 술안주인 노가리를 소재로 생명력을 표현한 작품, 전봇대를 사용한 건물의 기둥과 구리로 된 커튼 등 남이 하지 않은, 할수도 없는 것들이 전시되어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연출하고 있다. 손 관장은 “관념적 지식의 틀이 없기 때문에 항시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다.”며 후배들에게도 “먹고 마시는 것 등 일상의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이며 예술이 될 수 있다. 창작의 소재를 멀리서 찾지 말고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사고를 통해 문화예술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사고를 품을 것”을 당부했다.

후배들이 이곳에서 휴식하며 보다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으면 한다는 손일광 관장. 부와 명예가 성공의 척도가 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며 미소짓는 그의 아름다운 해피바이러스가 머물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많은 이들에게 퍼져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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