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왜곡의 끝은 어디?

이미 여러차례 칼럼을 통해 밝혔지만, 내년부터 일본의 초중고 학교에서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의 교육이 의무적으로 실시된다.

이러한 독도에 대한 왜곡된 내용의 역사 교육을 위해 일본 정부는 2000년부터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해왔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독도문제는 역사적으로 법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어느 면에서 보아도 우리의 영토가 분명함에도 일본의 영토 야욕은 오늘도 그칠줄 모르고 현재 진행형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야를 가진 일본의 이같은 태도는 무엇 때문일까?

그동안 일본에서 비롯된 역사 왜곡의 사례를 통해 일본의 진의를 가늠해 본다.

먼저,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大和) 왜(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를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중 신공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國과 4邑을 점령하고, 그 후 임나(任那, 가야)에 일본부를 설치하였으며,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졌던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식민사관의 산물이었고, 여기에는 칸 마사토모(菅政友),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등의 인물들이 일본의 임나 지배를 전제하면서 고증 작업을 행하였다. 이들에 이어 스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가 『大日本史 (1933년)』 한 편으로 日韓關係를 정리하면서 제2차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임나일본부설을 와성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년)』이다.

스에마스에 의해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일본(日本)’이라는 국명도 7세기 중엽 이후에 정립된 점 등을 감안한다면 임나일본부설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다만,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같은 주장은 사라졌으나,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 열도와의 활발했다는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었거나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이 임나일본부였다는 등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을 거론하기도 한다. 즉,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만, 이에 대하여는 다음 항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왜곡 문제이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제19대 왕이었던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왕이 죽은 2년 후인 414년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사면석비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웠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오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글자를 따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이 능비는 고구려 멸망과 더불어 잊혀졌다가 19세기말에 재발견되었다. 당시 청나라가 만주지역의 봉금(封禁)을 풀고 이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한 후인 1880년을 전후하여 개간을 시작하면서 농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이렇게 발견된 비를 당시 지사였던 장월(章越)이 관월산(關月山)을 시켜 능비를 조사하게 한 뒤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되면서 능비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능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 불량과 탁본 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18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쌍구가묵본의 쌍구(雙鉤)는 탁본과 달리 비문 위에 종이를 대고 글자 주변을 선으로 그리거나 이미 한 탁본을 대본으로 하여 복사하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쌍구한 것을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나머지 종이 면을 먹으로 칠해 탁본처럼 만든 것을 가묵(加墨)이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 마침 만주를 돌아다니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카와 가케노부(酒匂景信) 중위에 의해 이 능비의 쌍구가묵본이 입수되어 일본 참모본부에 제공되었다. 이렇게 제공된 비문은 1889년 일본 아세아협회가 발행한 『회여록(會餘錄)』제5집을 통해 요코이 다타나오(橫井忠直)가 석문(釋文)과 함께 비문의 전문을 공개하였는데, 비문의 입수부터 공개까지 5년여의 기간동안 일부 문자가 변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때 발표된 신묘년 기사를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해석하여, 당시 일제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식민지배의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바로 이 ‘신묘년 기사’가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는데, 현재 신묘년 기사의 정확한 문자 판독이나 기사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비석의 주인공인 고구려와 광개토대왕 중심으로 해석해야 함에도 왜가 주체가 되도록 하는 해석한 신묘년 기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나아가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지평을 열어가는 발전적 요구라 하겠다.

세 번째로 ‘칠지도(七支刀)’ 관련이다.

칠지도는 일본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져 내료오는 철제 칼로 칼의 좌우로 각각 3갰기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칠지도라 부른다. 전체 길이는 74.9cm이고 칼날 길이는 65cm인데, 칼의 양면에는 60여자의 명문이 금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본래 육차모(六叉鉾)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으나,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칸 마사토모(菅政友)가 칼날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면서 칠지도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칠지도에서는 명문으로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34자가 새겨진 곳을 보통 표면(表面) 또는 앞면이라 부르고, 27자가 새겨진 곳을 이면(裏面) 혹은 뒷면이라 부른다.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칠지도에 대한 학자들의 분분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칠지도의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태△ 4년’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주체, 곧 왜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준 정치체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칠지도 제작 연대와 관련하여 칸 마사토모는 명문에 나타난 ‘태□4년(泰□4年)’을 중국 서진의 연호인 태시(泰始) 4년으로 해석하여 268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는 이를 동진(東晋) 연호인 태화(太和) 4년으로 해석해 칠지도가 369년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통용되기도 하였으나, 백제 근초고왕이나 전지왕 시기의 독자적인 연호설을 비롯하여 북위(北魏)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480년)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금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칼이 5세기 후반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난다는 점에서 칠지도를 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칠지도를 만든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첫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둘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셋째 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넷째 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지금까지는 두 번째 백제왕 하사설이 타당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완전하게 결론 짓지는 못한 상황이다.

어찌되었든 칸 마사토모는 이 칠지도가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신공황후 49년(369년)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었으며, 신공황후 52년(372년)에는 백제 사신이 칠지도(七枝刀)·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七枝刀가 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고대사 왜곡에 있어 ‘후지무라 신이치(藤村信一)’를 빼놓을 수 없다.

후지무라는 일본의 고고학자로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운 후 1972년부터 발굴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座散亂木) 유적에서 당시로서는 최고(最古)인 4만 수천년 전의 석기를 발굴하였고, 이 후에도 그가 발굴하는 곳에서 항상 고대 유물이 나와 `석기의 신' `신의 손'으로 불렸다. 그리고 그가 발굴한 유적을 통해 일본의 인류 역사가 7만-5만년 전에서 약 70만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갔었다. 그러나 2000년 10월 그가 구석지 유적지에 석기를 파묻는 모습이 몰래카메라에 포착돼 그 모습이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유적날조 의혹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후 일본 고고학협회는 2000년 11월 긴급위원회를 열고 후지무라 신이치를 협회의 명예를 손상한 이유로 제명했다. 그리고 유적 조작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2001년 5월 유적 재검증 조사단을 구성, 후지무라가 관여한 홋카이도(北海道)에서 간토(關東)지방에 이르는 180여 곳의 유적들의 진위여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그가 발굴한 총 180여곳의 유적 가운데 162개 구석기 전·중기 유적이 모두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일본의 인류 역사는 다시 비교적 확실한 유적이 존재하는 7만-5만년 전으로 되돌아갔다.후지무라 사건의 배경에는 한국의 구석기 유물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경기도 연천의 전곡리 선사 유적지에서 발견된 구석기는 무려 27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일본에도 한국 못지 않은 구석기 유적이 있을 것이라는 열망이 후지와라의 조작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일본의 역사가 한국이나 중국보다 더 앞선다고 주장해왔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일본의 역사 왜곡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역사적 열등감이 문제인 것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일본에 의한 역사적 사실 왜곡 사례를 종합해 보면 일본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이미 주어진 지정학적 여건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랜 세월 공존해온 이웃 국가의 안위를 차갑게 외면하는 일제의 무책임한 탐욕 속에 20세기 초반의 한국과 중국의 역사는 처절하게 유린되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주변국들의 역사적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왜곡된 역사 교육을 통해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삼켜보려는 일본의 또다른 탐욕이 너무도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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