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철 박사 칼럼] 독도 이야기-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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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철 박사 칼럼] 독도 이야기-26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18.09.1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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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법재파소(ICJ) 판결과 독도

 

일본은 해마다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을 담은 공식 외교문서를 우리나라에 보내온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부동산의 취득시효 때문이다.
부동산의 경우 ① 해당 부동산을 소유의 의사로써 점유하고, ② 그 점유가 평온 ·공연(公然)히 행하여지면서, ③ 20년간 계속하여 점유할 때에는 해당 부동산 소유가 적법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 점유에 대해 누군가 이의를 제기할 경우에는 취득시효는 그 시점부터 다시 기산해야 한다.
독도의 경우 현재 우리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측의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20년이 지난다면 우리가 적법하게 소유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매년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보면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주장이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인 제스처인 듯하지만, 속으로는 법적인 계산까지 감안하여 취하는 고도의 전략이라 하겠다.
법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는 독도와 같은 도서에 대한 판결을 어떤 시각으로 내리고 있는지 두 가지 판례를 바탕으로 살펴본다.
먼저, 1953년 판결이 내려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이었던 ‘에크레호·망끼에 사건’을 보자. 에크레호 및 망끼에 암초는 채널제도를 구성하는 건지(Guernsey)섬 지역과 저지(Jersey)섬 지역 중 저지섬 지역에 속한다.
<참고 지도-1>에서 보듯이 이들 암초는 지리적으로 영국 보다 프랑스에 훨씬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게 영유권이 인정된 판례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말부터 이들 암초에 대하여 60여년간 영유권 주장으로 맞서 오다가 1950년 12월 29일 부탁 합의에 의해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에 회부되어 1953년 11월 17일 영국의 승소로 종결되었다.
이 사건에서 영국은 1066년 노르망디공에 의한 영국과 네델란드 정복으로 이들 암초가 채널제도와 더불어 노르망디공국에 통합되었고, 1204년 프랑스 필립왕에 의한 채널제도에 대한 점령시도가 실패하였으므로 이들 암초를 포함한 채널제도는 여전히 영국에 보유되어 왔다고 본원적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본원적 권원에 의하여 프랑스와 체결한 각종 조약에 따라 실효적 지배를 해왔으며, 이들 암초에서 발생한 사건은 채널제도의 저지재판소가 1826년부터 1921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형사재판권을 행사해 왔을 뿐만 아니라 1820년 저지주민이 이 지역에 건축한 가옥에 대하여 과세는 물론 이 지역 내에서의 부동산 매매계약은 저지행정당국의 통제를 받아왔다는 사실에서 실효적 지배의 권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노르망다공은 프랑스왕의 가신이었고, 1066년 이래 영국왕은 노르망디공의 자격으로 프랑스왕이 수여한 봉지를 봉령으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933년 이래 채널제도는 프랑스왕의 봉지로서 노르망디공은 채널제도를 포함한 노르망디 전체를 대표하여 프랑스왕에게 복종하여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202년 프랑스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영국왕 존(Jhon)은 프랑스의 봉지로서 그가 보유하고 있던 노르망디 전체를 포함한 전토지를 몰수당한 것이라고 프랑스에 본원적 권원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프랑스는 이러한 권원에 기초하여 이들 암초에 대한 1831년 수로측량, 1861년 이래 75년간에 걸친 조명과 부표 관리, 1938년 수상과 공군상의 시찰, 최근의 수력발전 계획 등을 통해 실효적 지배를 확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 당사국의 주장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는 본원적 권원의 경우 비록 프랑스의 왕이 본원적이고 봉건적인 권원을 가졌었다고 할지라도 그같은 권원은 1204년과 그 이후의 여러 사건의 결과로 소멸된 것이며, 실효적 점유에 의한 프랑스의 1202년 판결은 채널제도에서 집행되지 않았고, 7세기나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법적 효력을 살리는 것은 법적 고려의 합리적 테두리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소는 중요한 사실은 중세기에 있었던 사건으로부터 추측되는 간접적 추정이 아니라 이들 암초의 점유에 직접 관계되는 증거라고 하면서, 프랑스에 의한 수로측량, 조명 및 부표 관리, 수상 및 공군상의 시찰, 수력발전 계획 등의 사실은 이들 암초에 대한 유효한 권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표시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판시하였다.

참고 지도-1 저지 섬 지역에 포함된 ‘에크레호 및 망끼에’
참고 지도-1 저지 섬 지역에 포함된 ‘에크레호 및 망끼에’

 

이 판결의 내용을 교훈 삼아 일본측에서는 독도에 대한 지리적 여건은 중요하지 않고, 독도에 대한 실질적이고 실효적인 조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였다. 특히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가와가미 겐죠의 『죽도(독도)의 역사지리학적 연구』(1966년 발간)에서는 죽도(독도)의 시마네현 편입 이후의 경영 부분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즉, 독도를 시마네현 고시로 편입한 이후 취한 조치로 토지대장에의 기장, 토지의 대여와 사용료 징수, 인광 채굴의 허가, 강치잡이 면허 등을 통해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사이에 있었던 페드라 브랑카 사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이 사건은 말레이시아 본토로부터 14.3km, 싱가포르 해안으로부터는 46km에 위치하고 있는 페드라 브랑카 섬(포르투칼 이름으로 싱가포르에서 사용하는 이름이고, 말레이시아 이름은 푸라우 바투 푸테임)과 미들 락스 및 사우스 레지에 대하여 1980년 이래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를 상대로 영유권을 주장하여 2003년 7월 24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 사건이다. 재판소는 2008년 5월 23일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에 있어서 말레이시아는 페드라 블랑카, 미들 락스 및 사우스 레지 3개 도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들 3개 도서와 싱가포르해협 내 및 그 주변의 기타 도서는 1824년 조호르(Johor) 술탄의 일부였고, 술탄의 주권과 이의 인근 도서로의 확장은 영국이 반복하여 승인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1824년 크로포드(Crawfurd) 조약에서 확인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호스버그(Horsburgh) 등대 건설을 위해 조호르 술탄과 테멘공(Temmenggong)의 허가를 받았는데, 이 허가는 등대 건설에 좋은 장소였던 페드라 블랑카까지 확장되었다. 등대 건설에 동의했던 영국은 페드라 블랑카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 적이 없고, 등대의 소유, 관리 및 운영은 영토주권의 동의를 받았을 때와 같은 주권행사를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영국도 싱가포르도 분쟁이 되고 있는 페드라 블랑카와 관련하여 결정적 기일 이전의 어느 때에도 이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다. 이와는 대조로 조호르와 그 계승자인 말레이시아는 이들 도서에 대한 주권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
반면 싱가포르는 1847년부터 1851년 사이에 페드라 브랑카 등대 건설의 계획 및 비용을 실제로 지불하였고, 1851년 9월 27일 인도정부 관리가 공사완료 점검을 함으로써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권한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1851년 이후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국가 권한의 계속적, 평화적 및 실효적 행사를 지속하였는데, 1979년 이전 말레이시아는 페드라 브랑카가 싱가포르에 귀속된다는 공식적인 지도를 계속 발행하여 싱가포르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1953년 9월 21일 싱가포르 식민지의 조호르 외무장관 대리는 서신을 통해 조호르 정부는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어떠한 권한 주장도 하지 않고, 1953년 이전 권원 주장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호르는 오늘 이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위와 같은 양 당사국의 주장에 대해 재판소는 싱가포르의 행위 및 그 이전 국가들의 주권적 행위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주권 행위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반박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면서 1980년까지 페드라 브랑카에 대한 주권은 싱가포르로 이전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다음으로 미들 락스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재판소는 양 당사국의 어떠한 행위도 미들 락스에 적용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원시적 권원은 조호르 술탄의 계승자인 말레이시아에 있다고 판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사우스 레지에 대하여는 이 도서가 간출암으로 특별한 지리적 개체에 해당하기에 특별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양 당사국은 이들 3개 도서에 대해 각가의 도서에 대한 영유권을 별도로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간출암인 사우스 레지는 이것이 위치한 영수국가에 속한다고 결론지었다.

참고 지도-2 페드라 블랑카 섬
참고 지도-2 페드라 블랑카 섬

 

두 번째 판례인 페드라 블랑카 사건에서 중요한 시사점은 영유권에 대한 지속적이고 평화적인 의사 표명이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리적인 위치문제나 지도를 근거로 한 영유권 주장은 큰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엊그제 12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와 일본의 해묵은 과제인 평화조약을 올해 한에 체결하자고 전격 제안한데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 러시아가 실효지배중인 쿠릴 4개섬(일본측에서 북방 4개도서)의 일본 귀속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여 양국간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영토문제는 국가의 그 어떤 문제 보다는 앞선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명백히 증명해 보이는 상황이다.
우리도 독도에 대하여 막연하고 당연하게 우리 영토라 여길 것이 아니라, 어떤 근거와 논리를 가져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영토는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의지와 분명한 논리를 근거로 다져나가야 할 국가적 자존심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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