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의 변화

어느새 9월을 맞이하였다. 그 요란스러웠던 폭염도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9월에는 독도와 관련하여 일본에 대한 몇 가지의 기억들이 새롭다.

먼저, 1945년 9월 2일. 이날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국인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의 결정을 위하여 연합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가 설치된 날이다.

그리고, 1951년 9월 8일. 이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은 날이다. 다음해인 1952년 4월 28일 발효된 이 조약은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하고 대만과 사할린 남부 등에 대한 일본의 모든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9월에는 2차대전 처리와 관련하여 일본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근거로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펼치고 있음에서 필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오늘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살펴보면서 필자의 당혹감을 독자들과 공유해 보고자 한다.

<1905년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조치 이전>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에 의해 독도를 불법적으로 영토편입 조치를 취한 시기까지 독도는 한국땅으로 분명하게 인정되고 있었다.
특히 1693년과 1696년 두 번에 걸쳐 일본에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약받은 안용복의 역할이 있었다. 1696년 1월 28일 취해진 에도 막부의 죽도도해금지령은 당시 독도영유권 논쟁의 분명한 마침표였다. 에도막부의 독도에 대한 조선땅 인정은 1870년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와 1877년 일본 태정관에서 내무성에 내린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지령에서도 그대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명치유신 시기에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한 배경에는 일본 외무성의 관리였던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1831~1915)가 있었다.

<1905년 시마네현 독도 편입조치 이후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시기>
이 시기에는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점기 35년에 이어 1945년 8·15 해방과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그리고 1952년 1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으로 시작된 독도문제 관련 왕복 외교문서 공방전이 있었다.
특히 왕복 외교문서 공방전 시기에는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를 4차례씩 주고 받았다.
이 시기에 일본 정부는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영토편입 조치를 정당화시키려는 방향에서 독도 영유권 논리를 주장하였고, 그 중심에 가와가미 겐죠(川上健三)가 있었다. 
가와가미는 일본 외무성 조약국 직원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영토연구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논리를 만들었으며, 1950년대 왕복 외교문서 공방시 일본측 논리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외교문서상 일본측에서 주장한 독도 영유권 논리가 가와가미가 1966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죽도(독도)의 역사지리학적 연구’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에 기인한다.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영토편입 조치가 ‘무주지 선점’을 바탕으로 취해진 관계로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를 정당화하자면 독도를 ‘주인없는 무주지’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가와가미는 한국사람이 독도를 인지해 왔음을 시사하는 확실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연환경과의 관계까지 왜곡시켰다. 그는 해상에서 물체를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거리공식을 제시하며 독도에서는 울릉도가 보이지만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한편, 울릉도로부터 독도에 이르는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기 때문에 전체 한국의 연안해역 중에서 가장 안개 발생 횟수가 많은 장소의 하나여서 독도를 바라볼 수 있는 쾌청한 날씨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일본측의 이같은 논리는 왕복 외교문서 공방의 일본측 제2차 외교문서와 제3차 외교문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일본측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한 영토편입 조치를 정당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2000년까지의 시기>
이 시기에는 일본 고위 관료들의 독도 영유권 관련 망언들이 쉬임없이 터져 나왔고, 우리 정부측에서는 일본측 행위에 대한 성명이나 논평,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 초치 정도의 대응이 있었다.
그리고 ‘무주지 선점’을 바탕으로 1905년 시마네현 고시를 정당화시키려는 일본측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본 외무성 과료였던 가와가미  겐죠가 1905년 타계하자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인 츠카모토 다카시(塚本孝)가 독도 영유권 논리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했다. 정확한 신상 명세가 공개되지 않아 나이와 출신이 불분명하지만 츠카모토는 1977년 일본 국회도서관 직원으로 ‘해양법과 관련한 4개의 표’를 일본 국회도서관 레퍼런스에 게재하고 있는 기록이 처음 나오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4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츠카모토는 일본 국회도서관 이슈 브리프 244호에서 1994년 4월 12일 발표한  “竹島(獨島) 領有權 問題의 經緯”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상으로 독도가 일본이 보유하는 섬으로 확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츠카모토는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시마네현의 독도연구회, 독도문제를 생각하는 강좌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등 독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다만, 이 시기에 있어 일본측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국제법상의 ‘무주지 선점’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같은 국제문서를 근거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있어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영토분쟁 판결에서 단순한 역사적 사실관계 보다는 협약이나 조약과 같은 공식적인 문서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시기에 있어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분위를 감안하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내용을 근거로 ICJ 제소와 같은 공세적 주장을 펼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2000년대 들어 일본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해 가면서 후세대에 대한 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일본은 2000년대 들어 초중고 학생들에 대한 독도 왜곡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초 2022년부터 실시하려던 독도 왜곡 교육을 내년부터 실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독도 영유권 논리도 아예 ‘고유영토론’을 중심으로 펼쳐가고 있다.
1905년 시마네현 고시가 있기 전까지는 독도에 대하여 ‘일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던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독도 영유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그때 그때의 국제적 분위기를 반영한 독도 영유권 논리를 이제는 ‘고유영토론’으로 덮어가고 있다.

2018년 9월.
폭염을 밀어낸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독도에도 펼쳐 있겠지?
지금은 우리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지만, ‘고유영토’라고 교육을 받은 일본의 초중고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있을 30여년 후의 시기에 독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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