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강치를 그리며…

작년 문재인 대통령의 넥타이 속에서 ‘독도 강치’ 모습이 나타나면서 화제가 되었던 ‘독도 강치’.
해양 포유류인 강치는 물개나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물범 등과 같은 족속이지만 강치는 주둥이가 물개류 보다 길고, 뒷발 발가락 길이가 물개류는 일정한데 비해 강치는 일정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옛날에는 강치를 ‘해려(海驢’라고 불렀는데, 이때 불린 ‘려(驢)’는 ‘나귀’를 뜻하는 한자로 강치의 매끈한 몸매가 당나귀를 닮은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을 지닌 강치가 한 때 독도 지역에서 4만여 마리가 서식하며 독도 수호신 역할을 했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만 마리나 서식했던 독도 강치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은기도민(隱岐島民)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을 비롯한 일본인 어부들의 무분별한 포획에 있었다. 은기도 어부인 中井養三郞은 1903년 독도(일본에선 죽도)에 와서 처음으로 강치 잡이를 시작하면서 강치잡이로 인한 수익이 크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中井은 독도 강치를 포획하는데 있어 隱岐島에서 함께 시작한 석교송태랑(石橋松太郞) 뿐만 아니라 정구용태(井口龍太), 가등중조(加藤重造) 등과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자 이 사업의 독점을 꾀하여 1903년 9월 29일 일본 內務·外務·農商務 등 三大臣 앞으로 “독도 영토편입 및 貸下願”을 제출하였다. 바로 이 대하원이 일본 정부가 독도를 도근현(島根縣)에 편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中井은 이 대하원에서 ‘독도 강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생(中井)이 울릉도 왕복도중에 독도에 기박하여 해려(海驢)의 생식이 많음을 보고… 명치 36년(1903년)에 이르러… 해려 사냥에 착수하였나이다… (강치의)가죽을 소금에 절이면 우피 대용으로서 대단히 수용이 많아지고, 신선한 지방에서 채취되는 기름은 품질 가격이 다같이 경유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그 찌끼미는 충분히 짜면 아교의 원료가 될 수 있고, 살은 분제하면 뼈와 더불어 귀중한 비료가 된다는 것 등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강치잡이가 1903년 2,760두를 필두로 1904년 2,750두, 1905년 1,003두, 1906년 1,385두, 1907년 1,600두, 1908년 1,680두, 1909년 1,153두, 1910년 679두, 1911년 796두 등 9년 동안 13,806두에 이르렀다. 이중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잡은 5,138두 중 새끼 강치도 1,437두나 된다. 이는 中井 등이 강치를 포획하는데 있어 강치의 보존은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로도 강치 잡이는 1929년까지 매년 100두 전후였다고 中井養三郞의 아들인 중정양일(中井養一)의 구술서(口述書 )에 확인되고 있다. 결국 ‘독도 강치’는 일본인 어부들의 손에 의해 멸종되고 말았다.
만약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였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면 독도 강치를 씨를 말리면서까지 포획할 수 있었을까?
독도 강치를 멸종시킬 정도로 포획을 한 행위의 이면에는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 아니라는 의식이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지난 일제 식민지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야마모토 정호군(征虎軍)’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선땅의 호랑이를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했다. 이 역시 조선의 호랑이에 대한 일본의 의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다.

이렇게 멸종된 독도 강치.

지난 2014년 2월 당시 해양수산부에서는 멸종된 독도 강치를 복원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그 후로 독도 강치 복원에 관한 얘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일본측에서 독도와 관련하여 취해지는 독도의 날 행사, 교과서 왜곡 및 의무교육 실시 등에 대한 대응조치 중의 하나로 ‘독도 강치’ 복원도 서둘러 주기를 기대해 본다.

독도 강치를 그리며----

독도 강치 자료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자료
독도 강치 자료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자료

 

저작권자 © 한국미디어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