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기억합시다(2)…사운(史芸) 이종학(李鍾學)

사운 이종학 독도박물관 초대 관장은 1927년 1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고,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끝으로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호 ‘史芸’은 ‘芸’이라는 글자가 ‘향풀 운’자여서 ‘사운’이라는 의미는 ‘역사의 향풀’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종학 선생의 아호가 ‘史芸’이었던 데서 기인한다.

<운명처럼 서지학자의 길로 들어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그는 29세가 되던 1955년 종로5가에 권독서당을 세워 운영하다가, 2년 후에는 연세대 근처에 연세서림을 세워 놓고 일반서적과 함께 고서를 취급하면서 서지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70년대초 교육자이자 장서가로 이름이 높았던 吉谷 徐仁達(1902~1990) 선생을 만난 것은 운명이라 해도 무방했다.
어느날 서점에 노신사가 오셔서 고서를 내놓기에 그분이 부르는 대로 값을 쳐 드린 뒤 찻집에 모시고 가서 차를 대접하였다. 그러자 그 노신사는 장사꾼이 무조건 값부터 깎으려 들지 않고 차까지 대접하느냐며 감격해 하셨다. 그 분은 자신의 집이 장위동이고 장서가 많은데 그 책들을 다 줄 터이니 찾아오라고 하셨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책에 대한 욕심과 호기심이 동한 데다가 그분의 태도가 워낙 진지하여 며칠 뒤 이종학은 그분의 집을 찾아갔다.
그분의 집에서 이종학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그분의 2층 서재에 값진 고문서들이 빼곡하게 차있는 데다가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책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귀한 책들을 선뜻 내어 주겠다는 그분의 말씀도 전설만 같았다. 그렇게 책을 내어주시겠다고 한 이면에는 당시 68세이던 그분에게 관상쟁이가 “내년에 돌아가신다.”고 하였기에 신변정리를 하고 있노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종학은 형식적인(?) 대금을 치르고 고서들을 용달차로 실어왔다. 그분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했지만 며칠 뒤 다시 그분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용돈(?)을 쥐어 드리고 돌아 나왔다.
그렇게 돌아나오는데 그분께서 이종학 선생을 부르시더니 신문지에 싼 고문서를 따로 챙겨 주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펼쳐봤더니 그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친필로 쓴 ‘閑山島歌’인 것을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했다. 너무도 귀한 자료라 날이 밝자마자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신문지 속의 것이 ‘閑山島歌’였노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게 있었을 거야!”라고 하시며 태연하게 답을 하셨다.
길곡 서인달 선생은 그후로 10여년이나 더 사셨으니 관상은 틀린 셈이지만 ‘閑山島歌’로 보면 맞힌 셈이다.

이종학 선생은 그것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보존하고 계시다가 1998년 다른 자료 800여점과 함께 현충사에 기증했다. 그리고 이종학 선생은 ‘閑山島歌’를 보존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閑山島歌’가 원래 한시로 쓰여졌으며, 쓰여진 시기가 임진왜란 중인 1595년이 아니라 정유재란으로 한산도를 빼앗긴 뒤인 1597년에 전라도 보성에서 지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이종학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한산도가’를 검토해 보니, 지금껏 알고 있었던 것과 달랐어요. 그래서 30년간 ‘난중일기’ 등 다른 문헌들을 비교 검토해 보고서야 결론을 내렸지요.” 세계일보 1999년 7월 26일자 기사 참조

결국 이종학 선생이 ‘閑山島歌’를 얻게 된 것은 횡재라기보다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으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관련 자료들을 살피다 보니 그는 어느새 충무공 전문가가 되어 ‘閑山島歌’ 만이 아니라 ‘난중일기’ 번역이 오역 투성이라는 사실, 충무공이 수전 만이 아니라 육전에도 능했다는 사실 등 수없이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게 되었다.
이후로 이종학 선생이 일본의 고서점가를 기웃거리며 자료를 수집하게 된 것도 실은 충무공의 ‘閑山島歌’ 때문이었다.

<독도박물관 초대 관장이 되다>
독도박물관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박물관 부지는 울릉군이 제공하고, 박물관 건물은 삼성문화재단이 건립하여 울릉군에 기증하며, 전시 자료는 이종학 선생께서 수집한 자료를 국가에 기증하기로 약정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에 대하여 서로 얼굴만 붉히는 성명서 발표나 시위는 의미없는 행위라는 판단에서 확실한 자료를 토대로 일본에 대항해야 겠다는 소신이 독도박물관을 만들게 된 배경이었다. 이종학 선생은 독도박물관 개관 관련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종학, 독도박물관(1997. 8. 8) p. 2

“본인이 기증한 자료는 주로 일본측 스스로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못박은 것들입니다. 이는 일본측 자료가 더욱 객관적인 공신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 (중략) … 앞으로 독도박물관은 과거의 유물전시나 관람수익 위주의 편의적인 운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원칙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확하고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 전시를 하고자 합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종학 선생이 독도박물관에 기증한 자료의 수가 512점이라고 하여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킨 512년에 맞추어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중앙일보 1997년 6월 26일자 기사는 지도 80종 90점, 전적 88존 150점, 문서 9종 16점, 신문 92종 92점, 마이크로필름 82종 164점 등 총 351종 512점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 독도박물관 개관 인사말에서 이종학 관장이 밝힌 숫자는 지도, 신문, 잡지, 관보, 문헌 등 총 532점이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종학 선생님의 바람처럼 독도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대한민국 사람이기 보다는 보다 많은 일본인이 찾아주기를 희망해 본다.

<독도자료를 수집하다>
이종학 선생은 자비를 들여 발간했던 재일 교민 시사 교양지인 ‘월간 아리랑’ 지면을 통해 “내 평생에 가장 기쁘고 통쾌한 일을 꼽으라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는 1945년 조국 광복이고, 또 하나는 본인이 직접 1990년 7월 2일 시마네현에서 관계자로부터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항복을 받고 온 일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종학, 월간 아리랑 1996년 7월호 참조

바로 문제의 1990년 7월 2일 월요일날 이종학 선생은 독도문제로 시마네현청 관계자를 만날 결심을 하고 지사를 만나기 위해 현청으로 갔다. 당시 이종학 선생을 ‘독도 자료엔 독보적 존재’라고 소개한 조선일보와 세계일보 기사와 함께 몇 가지의 독도 관련 자료를 챙겼다.
그런데 지사와의 접견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성사되지 못했고, 대신 독도 담당관인 총무과장, 과장 보좌, 담당 계장 등을 직접 만나 몇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첫째,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1905년에 와서 새삼스럽게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필요했는가? 이 고시에는 無主島이니까 국제법상의 요식행위를 거쳐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고 했는데, 일본 고유의 영토라면 주인이 없는 無主島란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는 “독도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섬이어서…그런 절차가 필요했다.”고 답했다. 본인은 이 답변에 대하여 “일본은 섬나라로서 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데, 독도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작은 섬도 시마네현처럼 고시한 전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로, 오사카에서 구한 [한국신지리] 강원도편에 ‘리앙꼬르암’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일본의 유명한 학자 田淵友彦이 저술한 것인데, 울릉도 다음에 리앙꼬르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리앙꼬르가 한국의 울릉군에 속한다는 확실한 증거인데, 어떻게 無主島인가?”라고 물었더니, 그 자료를 복사해도 좋으냐고 하면서 아무런 답을 못했다.

세 번째로는, [은기도지]와 [시마네현지] 등 2권의 책을 펼쳐 놓고 “여기에 보면 리앙꼬 섬의 소속을 정하고자 본토로부터 거리를 측정해 본 즉, 일본으로부터 가까워서 일본의 것으로 편입했다. 그런데 거리에 대해 [시마네현지]에는 10浬, [은기도지]에는 10里로 표기되어 있다. 귀국에서는 浬와 里를 같은 개념으로 씁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과장은 “그것은 어딘가 한 곳이 틀렸다.”고 말하고는 아무말도 더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 일본은 독도를 본토와 가까워서 그들의 영토로 편입했다고 하는데, 어떤 섬이 본토로부터 가까워 그 나라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국제법상의 선례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거기까지는 공부를 못했다고 하기에 작심하고 한 번 더 질문을 이었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부산이 턱앞에 있는데, 만약 본토로부터 가까워서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이 귀국의 논리라면 이 대마도는 누구의 영토입니까?”
아무도 이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한 참 후에 물어오는 질문이 “정말 북방 영토는 우리(일본)의 것이죠?”란다.
독도를 비롯하여 한일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 문제들을 놓고 증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막연히 말로만 ‘이다, 아니다’를 되풀이 하는 것은 끝없는 소모전일 뿐이다. 정확한 증거를 제시할 때 일본도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고 밝혔다.

<지키지 못하는 독도, 독도박물관 문을 닫습니다>
지난 2000년 5월초 이종학 선생은 1997년 12월 5일 열린 일본 시마네현의회 제369회 정례회 회의록을 열람한 결과, 일본 당국이 1954년 독도 일대에 대한 광업권을 허가했으며, 이에 대한 세금을 징수해온 것으로 밝혀졌음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종학 관장의 이러한 공개에도 불구하고 정부측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 해 5월 23일 독도박물관 건물에 ‘지키지 못하는 독도, 독도박물관 문닫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울릉군청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종학 관장은 “우리 땅 독도를 지켜야 하는 책무를 다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돼 사직서를 제출한다”고 말했다.
보통의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소신을 굽히기도 하지만 이종학 선생의 독도를 지키려는 의지 앞에는 박물관장 직책도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료 수집을 위한 발품을 팔다>
이종학 선생은 1981년 11월 첫 일본 방문을 시작으로 2002년 11월 타계하실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50여 차례나 일본을 드나들었다.
일본의 주요 도서관을 찾아 독도를 비롯하여 한국과 관련이 있는 자료라고 생각되면 분량이나 중요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수집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대외비나 공개가 곤란한 자료를 접하게 되면 일본의 관계 직원들에게 아부 아닌 아부를 해야만 했다. 중요한 자료를 처음 접한 뒤 열람은 가능해도 복사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몇 번이고 찾아가보지만 쉽게 복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한 이종학 선생은 일본을 방문할 때면 의례 선물용 김, 멸치, 인삼제품 등을 준비해 갔다. 일본의 공무원들은 현금을 받는 것은 극도로 꺼리지만 한국의 특산품 선물에 대하여는 의외로 선호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복사가 쉽게 허용되지 않는 자료를 접하게 되면 해당 직원과 여러차례 접촉한 뒤 준비해간 한국 특산품 선물을 주면서 결국에는 자료를 얻어오곤 하셨다.
‘연세서림’ 시절 만났던 길곡 서인달 선생께서 일러 주셨던 “물건은 임자를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말씀을 이종학 선생은 평생토록 잊지 않으셨던 것이다.

<다시 찾은 이름 ‘華城’도 선생의 손끝에서 살아나다>
지난 1996년 12월 문화체육부 산하 문화재관리국은 일제 당시 지정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한 결과, 지금까지 ‘수원성’으로 불려진 성곽을 ‘華城’으로 공식 변경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수원성의 명칭 변경은 이종학 선생이 찾아낸 사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정조대왕 시절 축성을 앞두고 명명했던 ‘華城’이라는 명칭이 한일합방 한 해 전인 1909년 일제가 「한국수산지」에 수원성이란 이름을 쓰면서부터 화성이란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1996년 1월 문화재관리국에 ‘수원성의 이름을 화성으로 바꿔야 한다“는 청원서를 낸 것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게다가 1997년에는 화성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는 경사도 맞게 되었다.

<한 줌 재 되어서도 독도 지킬 터>
사운 이종학 선생은 2002년 11월 23일 오후 2시 수원에 있는 아주대 부속병원에서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전재산을 털어 국내외에서 온갖 자료를 수집하여 때로는 관련 학계를 위해, 때로는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자료를 내놓았던 서지학자로 사셨다.
그는 지난 1997년 독도박물관 건립에 헌신한 후 잠시 박물관장직을 맡기는 하였지만, 그 흔한 ‘전문위원’이니 ‘명예박사’니 하는 감투 하나 탐하지 않으셨다.
선생은 힘들여 수집한 자료의 공개와 제공에 대해 무척이나 관대하셨다. 일부에서는 언론플레이를 잘한다고 비판도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선생이 모아 제공한 자료들 덕분에 독립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 현충사 등에서 ‘역사의 향기’가 지속적으로 뿜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사료 수집에 몸바치시고, 그에 걸맞는 변변한 대접 한 번 받지는 못했지만 죽어서도 땅 한 평 차지하기를 마다하셨다. 선생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뼛가루를 독도 앞바다에 뿌려 달라”며 죽어서도 독도의 수호신이 되고 싶다고 하셨단다.
이 선생의 유해는 울릉도에 있는 독도박물관 옆 언덕에 모셔졌고, 2003년 6월 12일 ‘한줌 재 되어도 우리땅 독도 지킬 터’라고 쓰여진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고서적과 사료·지도·사진 등 1만 9,836점이 2004년 1월 수원시에 기증되었고, 2008년 10월 수원박물관 내 사운 이종학 사료관 속에서 ‘역사의 향풀’로 오늘도 숨쉬고 있다.

<사운 이종학 선생님을 잊지 말자>
금년 4월 10일 경기 수원시는 사운 이종학 선생 등 8명을 ‘수원시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로 선정했다고 한다. 서지학자 사운 이종학 선생(1927~2002)에 대하여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수원화성 및 독도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수원시와 독도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것이 수원시의 선정 이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선정 보다 중요한 것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헌신했던 사운 이종학 선생을 우리 모두가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이 아닐까? 

독도박물관 표석.이 표석 하단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 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운 이종학 선생의 의지임을 알 수 있다.
독도박물관 표석.이 표석 하단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 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운 이종학 선생의 의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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