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貞陵)과 신덕왕후(神德王后)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황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 강씨(1356~1396년)는 고려시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였다.

필자는 정릉 근처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정릉을 둘러보곤 한다. 북악산 기슭의 한적한 곳에 조성되어 있는 정릉은 걸어서 40여분 정도의 산책로로도 손색이 없다. 그 산책로를 걸으며 능의 주인인 신덕왕후의 삶을 살펴보았다.

먼저 신덕왕후를 부인으로 맞이했던 이성계의 상황을 보자.

1335년에 태어난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 보다 21년 연상이다. 그는 오늘날 함경북도 영흥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는데, 그의 나이 17살이던 1352년 2살 아래의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1337~1391년 10월 21일)와 결혼을 하였다. 신의왕후 한씨는 고려시대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이성계와 같은 영흥 출신이었다. 이성계와의 사이에서는 6남 2녀를 두었다.

6남중 첫째인 방우(芳雨, 1354~1393년)는 어려서 벼슬길에 나섰으나, 지병으로 일찍 사망하였다. 장남의 이른 사망으로 둘째였던 방과(芳果, 1357~1419년)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이 되었고, 다섯째인 방원(芳遠, 1367~1422년)이 제3대 태종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6남 2녀를 두고 있던 이성계는 그보다 21년이나 어린 신덕왕후 강씨와 혼례를 올린다. 혼례를 올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덕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 방번(芳蕃, 1381~1398년)이 1381년 생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적어도 1380년 이전에 혼례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1부 1처제의 관행이 보편적이었으나, 말기에는 사회적 혼란과 지배층의 문란으로 혼례에도 관행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방 출신 실력자들이 현지에서 결혼을 한 다음에, 개성에 진출하여 중앙귀족과 다시 혼례를 올리는 폐단이 나타났는데, 이성계 역시 이런 사례의 혼인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중차대한 문제는 왕세자 책봉에서 발생했다.

첫째 부인이었던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개국(1392년) 1년 전인 1391년 사망한 관계로 조선의 첫 번째 왕비는 신덕왕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한 첫 해인 1392년 세자 책봉이 이루어진다. 이성계에게는 신의왕후와의 사이에 6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조선 개국의 시점에서 정식 왕비로 신덕왕후가 인정받고 있었기에 세자는 신덕왕후의 두 아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장남인 방번이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조카딸과 혼인한 상황이어서 문제가 되는 관계로 세자는 차남인 방석(芳碩, 1382~1398년)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방석의 나이는 불과 10살이었다.

이방원을 비롯하여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의 아들들의 입장에서 보면 서자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신덕왕후가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신의왕후 아들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태조의 총애를 받던 신덕왕후가 1396년 지병으로 사망을 하게 된다. 태조는 궁궐 가까운 곳인 취현방(현재의 정동 영국대사관 근처)에 신덕왕후의 능을 웅장하게 조성하고, 능의 동쪽에 흥천사(興天寺)라는 원찰을 세워 두고 자주 왕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성계 이후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이 일으킨 왕자의 난(1398년)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 난으로 인하여 신덕왕후의 두 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아직 후사가 없었던 두 아들의 죽음으로 신덕왕후의 핏줄은 이렇게 끝이 났다. 만약 신덕왕후 두 아들의 후손이 있었다면 조선시대를 통해 또다른 피바람을 불어왔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방원과 신덕왕후와의 이같은 사연은 방원이 임금 자리에 오른 태종시대 들어 더욱 악화된다. 신덕왕후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테조 이성계가 1408년 사망하자, 태종은 다음해인 1409년 도성 안에 조성되어 있던 신덕왕후의 능을 현재의 정릉으로 옮겼다. 게다가 정릉의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헐어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하였으며, 무덤의 봉분을 깎아 자취를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였고, 석인(石人)은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1410년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으로 돌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세자 책봉으로 불거진 갈등이 신덕왕후 사후에도 지속된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태종에 의해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전락해버린 정릉의 주인 신덕왕후에 대한 복권 주장이 신하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종 10년(1669년) 신덕왕후를 종묘에 부묘하자는 송시열(宋時烈)의 상소를 현종이 수용함으로써 신덕왕후의 위패가 종묘에 모셔지고, 무덤도 다시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신덕왕후 사후 260년이 지난 1669년 음력 8월 5일 정릉의 상설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조성한 후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날 정릉 일대에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백성들은 이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주는 비’라며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조성되어 있는 정릉을 돌아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한다.

정릉을 비롯한 조선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특히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제자리에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다만, 조선 왕릉 42기 중 제릉(齊陵, 태조의 첫 왕비 신의왕후의 무덤)과 후릉(厚陵, 조선 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쌍) 만 북한 지역에 있고, 나머지 40기의 왕릉은 남한에 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왕릉을 찾아 조선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어떨까.

정릉 정자각과 봉분 모습(2021. 4 필자 촬영)
정릉 정자각과 봉분 모습(2021. 4 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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