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독도

며칠 후인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이기도 하지만, 현대사의 측면에서 보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 처리와 관련하여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1951년 9월 8일 서명되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프랑스·미국·소련·중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이었다.

전쟁 진행과정에서 연합국측에서는 2차 대전의 마무리와 전후 세계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그리고 소련의 수뇌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1941년 8월 10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이 정상회담을 통해 대서양 헌장 8개항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워싱턴, 모스크바, 카사블랑카, 퀘백 등지에서 전시회담을 개최하였다.

이같은 전시회담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독도’가 회담 석상에 최초로 등장한 것이 1941년 12월 1일자로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서 였다. 이 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 등 3대국은 당시 일제 식민치하에 있던 ‘조선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이로 선언>(1943. 12. 1)

THE CAIRO DECLARATION

Desember 1, 1943

…(전략)

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The afor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nd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free and independent.

…(후략)

…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탈취한 모든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축출될 것이다. 위의 3대국은 조선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히게 될 것을 결의하였다.…

카이로 선언 이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에 조인하였다. 독일이 항복하면서 연합국측의 행보가 바빠졌고, 7월 26일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 그리고 영국에서는 신임 애틀리 수상이 독일 포츠담에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는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포츠담 선언이 있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3일 후인 8월 9일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 이때까지 참전하지 않고 있던 소련이 2차대전에 참전하였고,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특히, 소련은 참전과 동시에 당시 쿠릴열도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점령함으로써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쿠릴열도 문제(북방4개도서분쟁)의 단초를 놓았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일본 도쿄에는 점령통치를 위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점령 초기에는 미국이 단독으로 통치를 했으나, 1946년 2월 26일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가 발족한 이후로는 이 위원회가 일본 관리에 관한 정책을 결정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독도’가 구체적으로 등장하면서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우리에게 반환해야 할 사항을 연합국 최고사령부에서도 인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독도를 중심으로 2차대전을 마무리짓는 강화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살펴본다.

당초 미국은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적 팽창정책에 오랜기간 시달렸고, 일본과는 태평양전쟁이란 사활을 건 참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소련의 세력이 급부상하고, 특히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군사력이 강화되고 중국이 공산화되자 패전국 일본의 군사적 재기와 보복을 방지하려던 점령정책을 바꾸어 오히려 일본을 재기시켜 공산세력의 팽창에 대항할 수 있도록 의도하게 된다.

바로 이같은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 속에서 강화조약 체결은 전례없이 지연되었다.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있어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부터 조약에 서명한 1951년 9월 8일까지 무려 6년 1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전통적으로 전쟁의 최종적인 마무리를 위해 맺어지는 강화조약의 체결기간을 감안할 때 대일 강화조약에 소요된 6년 1개월의 기간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장기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표-1= 전쟁 종결과 조약 체결 관련 참고자료
참고표-1= 전쟁 종결과 조약 체결 관련 참고자료

위의 <참고표-1>에서 보듯이 19세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쟁에 있어 전쟁 종결 후 조약을 체결하는데 소요된 기간이 최대 7개월을 넘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대일 강화조약 체결에 소요된 기간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문제는 소요기간도 문제이지만, 조약 체결과정을 살펴본다면 더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참고표-2>를 보면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미국측의 제1차 초안은 1947년 3월 20일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약 2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에 체결내용에 대한 충분한 점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제1차 초안에는 독도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한국에 귀속된다는 내용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짐작해 본다면 독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한국에 귀속되어야 할 섬으로 조약 작성 관련국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도가 한국에 속한다는 내용의 조약 내용은 독도의 경우 제1차 초안부터 제5차 초안이 제시된 1949년 11월 2일까지 아무런 변동사항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독도의 한국 귀속과 관련하여 제5차 초안이 발표된 1949년 11월 2일 이후 당시 일본 정부의 정치고문으로 활약중이던 미국인 W. J. Sebald가 1949년 11월 19일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의견서를 연합국측에 제출하면서 조약 초안의 내용에 변화가 일어났다. 시볼드는 미국의 안보적 고려를 내세우며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는 수정을 권고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시볼드의 개입으로 인하여 미국이 제시한 1949년 12월 29일의 제6차 초안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 포함된다고 규정하여 이전 1~5차까지의 사실이 완전히 번복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미국측의 입장 변화에 대해 조약 작성에 참여하고 있던 영국과 뉴질랜드가 이의를 제기한 결과로 제7차 초안부터 제9차 초안까지의 내용중에는 독도 관련 내용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거친 대일 강화조약 최종안은 1951년 9월 8일 조인되었는데, 조약 제2장(CHAPTER Ⅱ) 제2조(Article 2)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하여 독도와 관련한 내용은 빠진 채로 정리하였다.

일본은 2차대전 항복 이후 연합국의 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외무성 내에 《평화조약문제연구회》를 운영하면서 일본의 영토처리 문제에 치밀하게 대응하였다.

참고표-2=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상 독도 관련 조항 변경 현황
참고표-2=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상 독도 관련 조항 변경 현황

 

일본의 이러한 대응은 당시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회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에치슨(당시 미 국무장관), 시볼트(당시 일본 정치고문) 등은 일본의 국익을 위해 연합국 대표들과 상당한 논전을 거듭했다.……영토문제에 관해서는 최소한 일곱 권의 자료집이 (미국측으로)넘어간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 소속의 시모다 다케조(下田武三)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 발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일본 고유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이론 부장에 중점을 두었다……연합국 사령부는 평화조약에 관해 일본이 작성한 문서를 받아들이는데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 1946년까지는 주저했다. 그러나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일본이 작성한 문서의 가치가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1951년 9월 8일 체결되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독도 관련 내용이 조약 1차 초안부터 5차 초안까지 명문화되었던 것이 최종적으로는 삭제되어 처리되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독도 관련 내용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두고 일본은 독도가 일본 영토로 인정받은 근거라고 강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4월 28일을 앞두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다시금 독도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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