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독도박사 정연철 칼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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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독도박사 정연철 칼럼-8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21.02.2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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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의 날(2월 22일)을 맞으며

오늘 2월 22일은 일본에서 주장하는 소위 “다케시마(竹島, 우리의 獨島)의 날‘이다.

다케시마의 날 행사 주관은 일본의 지방현인 시마네현이지만 일본 정부는 이날 기념식에 정부 대표로 내각부 정무관(차관급)인 와다 요시아키(和田義明)가 참석할 것이라고 일본 교토통신이 15일 보도하였다. 아베 정부에서 8번 연속으로 차관급 인사를 참석시킨데 이어 스가 요시히데(管義偉) 정부에서도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챙기는 모양새다.

다케시마의 날 행사는 일본의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로 초기에는 중앙정부의 인사가 참석하지 않았으나, 2012년 12월 아베 정부가 출범한 이후부터 중앙정부 인사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정무관급 인사의 참석 행위는 단순히 독도 관련 행사의 문제가 아니라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을 심화시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2019년부터 일본의 모든 초중고교에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내용의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법제화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독도문제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보자.

독도문제가 한일외교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93년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한 사실이 시초였다. 이 때 에도 막부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약하였음에도 또다시 일본인들이 독도로 들어오자 안용복은 1696년 두 번째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한일 양국은 1693년부터 1699년까지 외교문서를 통해 독도 영유권 논쟁을 벌였다.(일본에서는 이를 ‘竹島一件’이라고 함) 최종적으로 일본 에도막부는 1696년 1월 28일 독도가 조선땅이며, 일본인들의 독도로의 항해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에도막부는 이때 “(울릉도를 포함한 독도는)지리상으로 조선과는 40리 정도이고, 이바나(因伯)에서 160리 정도로 일찍부터 그 섬이 조선의 땅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다만 쓸모없는 작은 섬을 무력으로 얻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일본인의 죽도 도해 금지를 단행하였다.

이같은 에도 막부의 조치는 1870년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와 1877년 일본 내무성 공문서에 대한 태정관의 답변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란 사실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881년 8월 발행된 기타자와 세이세이(北澤正誠)의 『竹島考證』은 6세기부터 19세기 후반(1881년)까지의 울릉도(당시 일본명 竹島)와 독도(당시 일본명 松島)에 관한 기록을 채집하여 분석하면서 “松島는 한국의 울릉도이고, 竹島는 즉 松島에 붙어 있는 작은 암석”이라고 결론지었다.

2월 22일에 생각해보는 우리의 독도
2월 22일에 생각해보는 우리의 독도

특히 일본 메이지 정부의 외교관료였던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1831~1915년)는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듣기에 ‘松島’는 일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며 사실은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이라고 합니다. 울릉도가 조선에 속한다는 것은 구정부(에도막부) 때에 한 차례 갈등을 일으켜 문서가 오고간 끝에 울릉도가 영구히 조선의 땅이라고 인정하며, 우리(일본) 것이 아니라고 약속한 기록이 두 나라의 역사서에 실려 있습니다”라고 밝힌 것이 『竹島考證』에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보면 독도문제는 1696년 에도막부가 독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하였고, 이어진 메이지 정부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같은 영토편입 조치는 위에서 살펴본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것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 행위이다.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에서 오래동안 활동하였던 최서면(崔書勉, 1928~2020.5.26.)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은 일본에 의한 1905년 독도 편입조치는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었다고 2014년 3월 밝혔다. 최 원장은 일본이 1899년 독도에 군사기지를 세우고자 했다는 내용이 담긴 《극비(極祕) 메이지(明治) 37~38년 해전사》를 발굴한 것이 그 근거라고 하였다. 메이지 37~38년은 러일전쟁이 있었던 1904~1905년 시기이다.

이에 의하면 일본이 청일전쟁(1894~1895년) 이후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0개년 군비증강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898년 4월 쿠바에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파견돼 전쟁을 참관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은 통신과 해저케이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세계 최고의 항해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함대가 미군이 전함에 설치한 무선 전신시설로 서로 연락해 협공하는 작전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야마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무선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유일한 방어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1899년 6월 외무대신에게 무선기술 개발과 망루 설치를 제안했다. 망루는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그가 제시한 안에는 대만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에 무선 망루를 세우는 계획이 들어갔다. 이어 석 달 만에 이 안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

일본은 이후 자국의 규슈와 주 고쿠, 한국의 죽변만(울진), 울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에 망루와 통신용 해저케이블을 설치했다. 실제로 러일전쟁을 지휘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한국의 진해에서 무선 전신을 받고 지시를 내렸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였고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1905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1899년부터 군사적 목표 아래 기지를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독도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간 독도문제는 일본 에도막부 시절에 우리 영토로 정리되었고, 메이지 정부시기까지 수용되었던 것을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면서 파생시킨 문제이다. 오늘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 행사가 열리겠지만, 이제라도 역사를 왜곡시킨 사실을 진지하게 반성하면서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정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왜곡된 역사를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에게 독도문제가 가장 큰 비극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2월 22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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