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독도박사 정연철 칼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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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독도박사 정연철 칼럼-3
  • 정연철 전문위원
  • 승인 2021.01.1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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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다시 읽으며

코로나19 확산세가 사그러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는 오는 1월 31일까지 수도권 2.5단계·비수도권 2단계를 계속하기로 16일 결정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따라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와 ‘밤 9시 이후 영업제한’이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의미있는 시간 보내기를 생각하다가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속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다시 꺼내 들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그 시절엔 저서의 자료를 구하는 과정이나 저자의 개인 사정과 관계없이 책 속에서 접하는 역사와 전기 등에 흥미를 가졌었다. 그런 책을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게 되자 책이 담고 있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책을 엮어낸 사마천의 개인사가 마음에 다가왔다.
사마천의 ‘사기’는 기원전 91년에 완성된 책이다.
‘사기’는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역사서로 이 책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의 책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이는 당시 사마천의 벼슬이 ‘태사공’이라고 하는 태사령이었기에 자신이 지은 책의 서명을 ‘태사령 사마천의 저서’, 즉 ‘태사공서’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태사공서’를 ‘사기’라고 부르게 된 것은 중국 삼국시대 뒤의 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의 선조들은 대대로 주(周)나라의 사관(史官)이 되어 왕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왕실이 몰락하여 사관이라는 세습적인 일도 중단되었다가 수백년이 지난 후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이 한(漢)나라의 태사령이 되면서 역사가의 가문이 이어지게 되었다.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때에는 사관의 지위가 예전의 영예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마담은 중국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아내려고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마천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중국의 고금(古今)에 걸친 통사(通史)를 저술해야하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중국 고대의 옛문서들을 공부하였고, 스무살 안팎에는 한나라의 전국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는 등 부친의 철저한 교육 방침에 따라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지속적으로 배양하였다. 그런 성장 속에서 사마담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궁중에서 다양한 서적과 기록을 접함은 물론 아버지가 물려준 자료 이외에 각지에 흩어져 있던 기록과 일화 등 모든 역사 자료를 수집하는데 힘쓰면서 역사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사마천이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에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의 나이 40세 전후의 시기에 전쟁에서 패한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궁형(宮刑)이라는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궁형이란 남근(男根)을 떼어 버리는 형벌로서 부형(腐刑)이라고도 한다.
그 당시 이릉은 빼어난 명장이었다. 불과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군 10만명과 싸워 그 중 1만명이 넘는 흉노군을 무찔렀으나, 불행히도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이릉의 전과가 얼마나 눈부셨는지를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한 무제(武帝)는 몹시 화가 나서 이릉을 처벌하기 위해 조정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무제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모두 이릉의 잘못을 성토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의 공을 칭찬하면서 무제에게 아첨을 하는 신하들을 꾸짖었는데, 이것이 구실이 되어 그는 사실을 왜곡하고 남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듬해 포로가 된 이릉과 관련하여 잘못 전해온 소식으로 무제는 이릉 일족을 모두 죽였고, 사마천에게도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 당시 한나라 형법에서 사형을 면하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50만 전이라는 벌금을 내던가, 다른 하나는 스스로 궁형을 받는 일이었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한 사마천은 엄청난 벌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대부로서 가장 큰 굴욕인 궁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98년이었다고 한다.
2년 뒤 대사령을 받고 출옥한 사마천은 중서령이 되었다. 그것은 무제가 궁궐 안에만 있게 되자 새로 마련한 지위로 중서령이란 조정의 정무를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 재상에 해당하는 요직이었다. 이는 궁정 안으로 출입이 허용된 남자란 거세된 남자들 뿐이었으므로 사마천에게 그런 지위가 주어졌던 것이다.
‘사기’가 서술하고 있는 규모는 중국의 옛 제왕들의 시대로부터 기원전 2세기인 사마천의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망라하고 있으며, 중국 뿐만 아니라 조선, 흉노 등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는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음악, 역)易)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다.
궁형이라는 극형을 받았음에도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합리적인 정신을 담아 엮어낸 ‘사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동양인에게는 빛나는 교훈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살펴보자면,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이었던 굴원(屈原, BC 343∼BC 278)이 초나라에서 추방당한 후에 유랑 중 썼다는 낭만주의의 걸작 ‘이소(離騷)’, 춘추시대의 노나라 학자였던 좌구명(左丘明, BC 556∼BC 451)이 눈이 멀어진 뒤에 썼다는 ‘국어(國語)’, 전국시대 제나라의 전략가였던 손자(孫子, BC 6∼5세기경)가 다리를 잘리고 난 뒤 편찬한 ‘손자병법(孫子兵法)’ 등과 같은 걸작들은 모두 저자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라는 놀라운 작품이 극형을 당한 후에 저술되었고,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한 것처럼 코로나19 사태의 극복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운이 더욱 상승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이 순간에도 코로나 종식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모든 분들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 초상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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