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

한국전쟁, 즉 6·25 전쟁 69주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2019년.

평화와 번영을 화두로 던지며 북한의 김정은을 통해 한반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6월.

오늘의 우리가 세계사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희생한 호국영령과 선열들에게 6월 만큼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새기면서 호국의 달 6월에 우리의 한일 과거사를 되짚어 본다.

작년 연말 촉발된 일본 해상초계기 P-1에 의한 우리 광개토대왕함 근접 저공 정찰비행 사건과 올 3월 ‘독도가 일본 고유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담아 내년부터 교육을 실시한다는 교과서 검정 승인 등의 행위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1842년 아편전쟁에서 서구세력에 무참히 패한 청나라 얘기를 듣고 충격에 빠져있던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페리(M. C. Perry)가 이끄는 군함의 위력 앞에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쇄국체제를 고수하던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었다. 이어 1858년에 미국의 총영사 해리스(T. Harris)가 통상을 요구하자 막부는 조정과 다이묘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막부의 정치적 운영 총책임자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미일통상조약을 맺고 이어서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 등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개국의 길로 접어 들었다.(安政五個國條約).그리고 1868년에 신정부는 에도 시대의 마지막 천황이었던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은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이제부터 정치는 천황이 여러 다이묘들과 함께 공의여론을 존중하고 개국화친한다는 내용을 신에게 맹세하는 5개조 서문을 발표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를 확립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러한 제 개혁들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한다. 신정부는 삿초 웅번의 다이묘를 시작으로 1869년에 다이묘로 하여금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을 천황에게 돌려주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版籍奉還). 그리고 1871년에는 번을 폐지하고 전국에 현(縣)을 설치하여 중앙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廢藩置縣).

일본에서 메이지 정권이 수립된 이후, 1869년 일본 메이지 정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은 외무성 관리들을 조선에 보내 정세를 몰래 살펴보도록 했는데, 그때 조사 항목 중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로 되어 있는 전말’을 조사해 오도록 지시하였다. 그 지시 사항과 조사 복명서(復命書)는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에 수록되어 있다.그리고 1876년 메이지 정부는 일본 전 국토에 대한 정밀한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기 위해 모든 현에 자기 현의 지도와 지적도를 조사·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시마네현에서 일본 내무성으로, 동해 가운데 있는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할 것인가 제외할 것인가를 결정해 달라는 질품서를 제출하였다.일본 내무성은 5개월 넘게 자료 조사를 한 끝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총리대신도 자료를 검토해 본 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이니 이것을 관리들에게 주지시키라는 결정과 지령문을 작성하여 내려 보냈다. 이것이 1877년 작성된 일본 태정관 지령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왕조나 정권이 새로이 탄생을 하게 되면 지적과 호적 조사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다스려야 할 땅과 인구를 조사 하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도 이러한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특히 한반도를 일본이 다시 찾아야할 영역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 국내적인 활동 외에 일본 영역 밖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1874년에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이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大和) 왜(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를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중 신공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國과 4邑을 점령하고, 그 후 임나(任那, 가야)에 일본부를 설치하였으며,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졌던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식민사관의 산물이었고, 여기에는 칸 마사토모(菅政友),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등의 인물들이 일본의 임나 지배를 전제하면서 고증 작업을 행하였다. 이들에 이어 스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가 『大日本史 (1933년)』 한 편으로 日韓關係를 정리하면서 제2차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임나일본부설을 완성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년)』이다.

스에마스에 의해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일본(日本)’이라는 국명도 7세기 중엽 이후에 정립된 점 등을 감안한다면 임나일본부설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다만,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같은 주장은 사라졌으나,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 열도와의 활발했다는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었거나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이 임나일본부였다는 등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을 거론하기도 한다. 즉,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본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제19대 왕이었던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왕이 죽은 2년 후인 414년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사면석비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웠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글자를 따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이 능비는 고구려 멸망과 더불어 잊혀졌다가 19세기말에 재발견되었다. 당시 청나라가 만주지역의 봉금(封禁)을 풀고 이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한 후인 1880년을 전후하여 개간을 시작하면서 농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이렇게 발견된 비를 당시 지사였던 장월(章越)이 관월산(關月山)을 시켜 능비를 조사하게 한 뒤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되면서 능비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능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 불량과 탁본 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18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쌍구가묵본의 쌍구(雙鉤)는 탁본과 달리 비문 위에 종이를 대고 글자 주변을 선으로 그리거나 이미 한 탁본을 대본으로 하여 복사하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쌍구한 것을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나머지 종이 면을 먹으로 칠해 탁본처럼 만든 것을 가묵(加墨)이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 마침 만주를 돌아다니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카와 가케노부(酒匂景信) 중위에 의해 이 능비의 쌍구가묵본이 입수되어 일본 참모본부에 제공되었다. 이렇게 제공된 비문은 1889년 일본 아세아협회가 발행한 『회여록(會餘錄)』제5집을 통해 요코이 다타나오(橫井忠直)가 석문(釋文)과 함께 비문의 전문을 공개하였는데, 비문의 입수부터 공개까지 5년여의 기간동안 일부 문자가 변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때 발표된 신묘년 기사를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해석하여, 당시 일제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식민지배의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바로 이 ‘신묘년 기사’가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는데, 현재 신묘년 기사의 정확한 문자 판독이나 기사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비석의 주인공인 고구려와 광개토대왕 중심으로 해석해야 함에도 왜가 주체가 되도록 하는 해석한 신묘년 기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나아가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지평을 열어가는 발전적 요구라 하겠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이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해석이다.

칠지도는 일본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져 내려오는 철제 칼로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고 중심부의 날을 포함하여 일곱 개의 날을 지닌 칼이라 하여 칠지도라 부른다. 전체 길이는 74.9cm이고 칼날 길이는 65cm인데, 칼의 양면에는 60여자의 명문이 금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본래 육차모(六叉鉾)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으나,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칸 마사토모(菅政友)가 칼날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면서 칠지도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칠지도에서는 명문으로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의 내용에 대한 해석이 아직까지 통일되지 못하고 있지만 칠지도에 대한 학자들의 분분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칠지도의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태△ 4년’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주체, 곧 왜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준 주체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칠지도 제작 연대와 관련하여 칸 마사토모는 명문에 나타난 ‘태□4년(泰□4年)’을 중국 서진의 연호인 태시(泰始) 4년으로 해석하여 268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는 이를 동진(東晋) 연호인 태화(太和) 4년으로 해석해 칠지도가 369년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통용되기도 하였으나, 백제 근초고왕이나 전지왕 시기의 독자적인 연호설을 비롯하여 북위(北魏)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480년)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금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칼이 5세기 후반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난다는 점에서 칠지도를 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칠지도를 만든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첫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둘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셋째 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넷째 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지금까지는 두 번째 백제왕 하사설이 타당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완전하게 결론짓지는 못한 상황이다.

어찌되었든 칸 마사토모는 이 칠지도가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신공황후 49년(369년)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었으며, 신공황후 52년(372년)에는 백제 사신이 칠지도(七枝刀)·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七枝刀가 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한반도 지배 관련 논리가 신공황후 활동에서 비롯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신공황후는 오진 천황을 임신한 채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년). 신라왕은 일본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하였고 말과 마구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임신중인 아이가 뱃속에서 나오려하자 배에 돌을 대어 아이의 출산을 늦추었고, 일본에 돌아가 치쿠시에서 오진 천황을 출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설은 왜곡된 것이라는 논란이 많다. 메이지 시대에 그려진 삼한정벌도 속 신라왕은 파사 이사금인데, 신공황후와 파사 이사금이 살았던 시대를 비교했을 때 서로 만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삼한 정벌설은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유의해야할 점은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이유로 삼았던 논리중의 한 가설이다.

호국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6월.

그 어느 때보다도 한일관계가 차가워진 최근 시기에 일본은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초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이르기까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내용의 교육을 실시하려 하고 있다.

필자가 살펴본 것처럼 일본이 바라보는 한반도는 그들이 과거에 지배했던 옛땅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이상 한일관계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지난 시기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한반도를 유린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 만큼 한반도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을 우리는 한 순간도 회피해서는 안된다.

광개토대왕함 저공 근접비행 사건을 일으킨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P-1
광개토대왕함 저공 근접비행 사건을 일으킨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P-1

 

저작권자 © 한국미디어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